에베소서
2014.05.11 10:15

(13강) 바울의 기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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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1:15-19http://onlycross.net/videos/eph/eph-011519(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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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설교>

 

‘주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는 주께서 주도하시는 세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의 신앙은 전적으로 주께서 주도하시는 세계를 살고 있음을 믿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주도하시는 세계를 산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야 할 것도, 이루어지는 것도 없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바탕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신자 됨을 모든 것을 이루시고 그 이루심으로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신 주님을 높이고 증거 하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앙의 대가가 되어서 뭔가를 보여주는 것에 둘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 어떤 열심과 실천으로 포장하고 그 포장 때문에 멋있게 보인다고 해도 다른 믿음과는 달리 좀 더 가치 있는 믿음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 눈에는 행함이 없는 것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더 믿음답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믿음에 대한 착시일 뿐입니다.

 

 

주 예수 안에서 믿음은 동일합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믿음을 포장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겉의 포장을 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믿음을 포장하고자 하는 그 의도를 믿음이 아닌 것으로 책망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주 예수 안에서’라는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만 해도 믿음을 빙자해서 교인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믿음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 예수 안’에는 주님의 일하심만 있을 뿐이지 우리가 일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일한 것이 없이 그리스도로 인해 천국 가는 것이 ‘주 예수 안’인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주 예수 안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당성의 도구로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주 예수 안에서 신자는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로 흠이 없고 거룩한 자로 여겨주시는 사랑과 은혜에 모든 초점을 두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안에 있게 하신 사랑과 은혜에 대한 기쁨만 남는 것이 진심으로 주 예수 안의 세계를 사는 신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 안의 믿음이기 때문에 이 믿음으로 신자는 서로 동일하게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으로 연합한 관계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깨어진 관계를 하나 되게 하신 통일입니다.

 

 

바울의 기도는 이 같은 주 예수 안에서의 세계로 향해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도를 보면서 지금 우리의 기도 방향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이고 기도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문제는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는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지속되어야 할 관계적인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알아가는 것은 바울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고 오직 지혜와 계시의 영이 오심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신앙은 신앙이 아닌 종교로 드러나게 됩니다. 나를 위해 신을 찾게 되고 나의 일을 위해 신을 부르는 종교성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신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 일이 관심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만 가능하다면 인간이 알고 있는 신에 대한 지식에 의해 조립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감싸고 있는 욕망에 의해 조작된 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배격하면서 하나님이 알게 하신 그 하나님만을 신앙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인해 알게 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살아 있느냐 살아있지 않느냐?’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성령이 오시게 되면 자기 존재는 지워지게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오심이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사람은 본래 자기를 위해 사는 자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성령으로 인해서 갈수록 자신은 희미해지고 지워지며 대신 하나님이 선명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요구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의 오십니다. 이것을 요 16:7절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계속 세상에 계시면서 모든 일을 하시지 않고 굳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서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동일한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몸으로 오셔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통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님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저주의 길로 가신 것이 참된 메시아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함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인간에게는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믿음 없는 인간의 믿음을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해결하실 분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을 사도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했다는 증거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기도를 근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한자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자기 노력의 대가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도 신앙을 이러한 시각으로 이해합니다. 열심히 한 것만큼 복을 받고 성령도 열심히 기도하고 원하면 받게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받게 되면 인간의 열심과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구원의 문제, 의의 문제, 용서의 문제 등등 하늘에 속한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늘에 속한 것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저주신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알고 싶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오심으로 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론 성령이 없이도 은혜를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 없는 자가 말하는 은혜는 땅의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땅의 것이 주어지고 땅에서의 일이 잘되는 것을 은혜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인해 알게 된 은혜는 하늘에 속한 것이고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을 존귀한 것으로 바라보며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한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신앙이 깊어집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에만 집중하게 되고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하게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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