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6.08 10:19

(16강) 교회와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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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1:19-23http://onlycross.net/videos/eph/eph-011923(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설교>

 

교회가 무엇일까요? 본문의 말씀 그대로 답을 내리면 그의 몸, 즉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유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을 때 ‘나를 위한 교회’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기독교인의 인식을 살펴보면 나, 교회, 그리스도로 각각 분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 교회를 찾아가는 나가 있고 그 교회에서 나를 위해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교회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찾으면서도 ‘나’라고 하는 자기 존재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교회에서 나란 존재는 무의미합니다. 나란 존재는 덮어지고 대신 그리스도만 선명하게 부각되고 증거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고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기를 위해 기도한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이 말한 크신 능력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을 능력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부활과 교회의 머리되게 하신 것으로 증거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능력은 2:1절에서 증거한 바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그리스도가 머리라고 할 때 교회는 이미 죽은 자도 살리시는 강력한 능력의 증거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또 다른 능력에 목말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능력도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릴 수가 없는데, 이미 세상에 없는 능력으로 산 자가 되었고 그 능력의 산물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 받기를 원한다면 죽은 자를 산자 되게 하신 부활의 능력을 능력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산 자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는 몸의 관계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즉 교회 자체가 죽음과 상관없는 생명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산자들의 연합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에 뜻을 두어야 할까요? 당연히 죽은 자들 가운데 있던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의 은혜 안에 있게 됨을 감사하고 그것을 최고의 복으로 기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하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몸의 관계에 있는 지체는 높고 낮음을 따지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라는 은혜 안에서만 존재 의미가 있을 뿐 내 이름, 개인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교회로 모인다고 하면서도 자기 이름을 위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가치 없는 인간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때문에 나를 살린 능력에 마음을 두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의 무엇이 자신을 끌어당긴다고 해도 끌려가지 않습니다. 더 강력한 부활의 능력이 붙들고 있고 놓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21절에 보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이름은 세상의 그 어떤 권세의 이름보다 뛰어납니다. 교회는 그처럼 뛰어난 이름에 소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에 비해 우리의 이름은 사망의 냄새로 가득할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께 소속되어 그의 이름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야 말로 무한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같은 내용들이 여러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러분이 교회로 모여서 누군가의 허물을 비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들의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살았다는 것은 모든 허물을 덮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허물과 죄를 덮으셨기에 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자의 세계에서는 누군가의 허물을 가지고 그를 비판하고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그의 허물을 덮고 있는데 은혜를 걷어버리고 허물을 보면서 비판하는 것은 자신이 산 자의 세계,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소속되어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십자가의 피로 살았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100% 살아난 사람이 있는 반면에 50%만 살아난 사람이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신 능력과 은혜는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산자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인들은 자신의 것을 첨가해서 좀 더 나은 신자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그에 따라 보상에 차별을 두시는 분으로 제멋대로 꾸며내고 자신이 생각하는 신의 취향에 자신을 맞추려고 합니다. 이러한 종교의 길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23절을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뜻입니다.

 

 

만물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만으로 충만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만물 위에 있는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신다는 것으로 충만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채워달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은석교회는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사람과 돈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부족한 것이 없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충만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인에게 불만을 갖는다면 그 이유도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는 모든 것들 하나하나 눈에 거슬리게 되고 불만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만을 설교를 이용하여 내 뱉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가고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매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후에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특별히 한 일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자신에게 마음을 둡니다. 이러한 인간을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다시 살림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입니다.

 

 

새사람으로써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를 산 자 되게 하신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품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입니다. 나를 살리신 은혜에 나의 노력과 정성을 첨가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린 다만 그리스도가 충만이 되는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배우고 그 질서를 따라 살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충만이 되는 이 세계를 증거하는 교회로 세워져 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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