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6.15 10:14

(17강) 진노의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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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1-5http://onlycross.net/videos/eph/eph-02010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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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설교>

 

바울은 모든 인간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말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본래적으로 죄에 속한 존재이며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인간입니다.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인가를 떠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 바로 이 죽은 자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진노의 자녀이며 죽은 자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또한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1절을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이 은혜이기 때문에 은혜의 대상은 당연히 죽었던 자이며 은혜는 허물과 죄로 죽었으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용서 안에서 구원 받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 건짐 받고 생명에 속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된 신자는 이미 한없는 은혜의 세계로 초청 받아 들어와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왜 자꾸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신을 죽음에서 건지신 은혜에 대해 소경의 상태로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노의 자녀로써 누리게 된 은혜를 깨닫게 되면 자신은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알지 못하면 자신이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닫고 성령을 받아서 뭔가를 행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신자다운 모습으로 나아질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진노의 자녀라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진노의 자녀가 된 것이기 때문에 죄가 없어지지 않는 한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라고 합니다.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죄가 없어질까요?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용서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의 본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인지한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지신 그리스도의 속량에 감사하며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은혜의 자리로 끌어가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먼저 알게 하시는 것이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죄가 용서되고 구원 받은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었다거나,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것은 이미 흘러간 옛 과거의 일이 되었고 지금의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자가 구원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허물과 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같은 현실이 말해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량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는 단지 죽은 자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그 어떤 희망도 없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허물과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허물과 죄에서 벗어난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은혜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높이고 찬송하게 하는 것에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은혜를 자각하게 되면 은혜만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은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자각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면 그리스도로 인한 죄 용서와 생명에 초점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교회 부흥과 무관하고, 나의 일이 잘된다거나 부요하게 되는 것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그러한 것을 언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교회의 옳음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해도 관심이 교회 부흥이나 인간의 복으로 향해 있다면 단지 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된 것을 의미합니다. 몇 살을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결국 죽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이 처한 비참함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참함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복음은 인간의 욕망과 무관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살리셨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인간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를 살리셨으니 산 자로서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살리셨다’는 말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산 자가 되었으니 죽었을 때와는 다르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리셨다는 것을 그런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살리셨다는 것이 그런 의미라면 산자의 특징은 허물과 죄가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허물과 죄가 있는 상태에서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허물과 죄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인데,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허물과 죄를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멀어진 것이 인간에게는 죽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죽은 자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 대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스림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뜻의 성취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을 살리셨다면 그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관계 단절이 죽음이라면 관계 회복이 살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목 제물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된 관계에 있게 하신 것이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산 자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내가 산 자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살리신 사랑과 은혜가 내게 가장 존귀한 은총이고 선물이다’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각이 있게 된 것이 ‘살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죽은 자도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뜻을 얹어둘 뿐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입니다. 반면에 산 자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자신을 살리신 사랑과 은혜에 온 마음을 집중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진노의 자녀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둔해진다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은총에 대해서도 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아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보이는 것을 좇게 되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를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사건이라면 신자는 생명이 실현되고 완성된 존재입니다. 이 증거를 자기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이 살았다는 증거를 자기 안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자신을 보면서 ‘살았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증거는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간섭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끌어가시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살리셨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은혜의 현장을 자신이 뭔가를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으로 확인하기보다는 내 자신이 어둠을 좋아하는 진노의 자식임을 끊임없이 발각되게 하시는 것으로 확인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은혜임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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