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6.22 10:25

(18강) 불순종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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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1-5http://onlycross.net/videos/eph/eph-020105(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설교>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현재로부터의 단절과 함께 소멸의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인간의 관심은 자연히 죽음의 시기를 좀 더 연장시키는 것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 소망으로 자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수명이 10년 20년 연장된다고 해도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육신의 소멸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이라는 비참에 처한 인간의 운명입니다. 바울은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러한 죽음에는 관심 두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경험되지 않는 죽음이고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죽음의 상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것을 생명에서 멀어진 죽음의 상태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죽음을 얼마나 실감하십니까?

 

 

사실 성경의 이런 내용들을 실질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으로 부딪히고 겪는 삶을 실질적인 문제로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도 공허하게 들리기 십상입니다. 죽음의 상태를 실감하지 못한다면 살리셨다는 것 또한 실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참된 세계에 대해 눈이 열리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증거합니다. 믿음을 주셔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시고 그 세계를 보고 알게 되는 것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와 위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2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불순종의 아들이었을 뿐입니다. 이 때의 삶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좇았을 뿐입니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진노의 자녀로, 불순종의 아들로 사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설사 알았다 할지라도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죽음과 생명의 상태가 우리의 현실에서 실증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생명도 마치 나와 무관한 듯 생각합니다. 우리를 살리셨다고 하지만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실감하고 확증할 수 있는 변화도 없으니 답답함은 더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답이 될 수 있을까요? 소위 성령의 역사를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할까요?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약점입니다.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 보고 경험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말씀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해결책은 시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과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계를 감지하지 못하는 둔한 상태로 단지 교회 생활만 있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불순종의 아들들인 우리를 살리셨다는 하나님의 일은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신비스러운 일이니까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기존 상식과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육체로 경험할 수도 없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인간이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으로 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마귀를 따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욕심을 따라 몸과 마음이 원한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스스로 죽음 아래 있는 진노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왜 나쁜가?’라고 반문 할 수 있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각한다면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 자체가 피조물의 본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면 ‘살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을 왜 불순종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을 죽음에 처한 자의 삶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사랑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죽었던 나를 살리셨다’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복으로 고백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뀌게 된 새로운 시각입니다.

 

 

죽었던 우리가 살았다고 해서 악한 본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신자가 기독교 신앙에 머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살리셨다면 적어도 악한 본성은 성령에 지배를 받으며 죄를 극복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를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헛됨을 알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생명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공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인해 생명 사건에 참여되었습니다. 이것이 산 자의 신분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달라진 신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것이 산 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내용으로 자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내용들이 이해되십니까? 이해되신다면 하나님이 불순종의 아들인 여러분을 순종의 아들로 부르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순종의 아들과 순종의 아들의 다른 점은 그 마음에 중심으로 자리한 것이 무엇인가로 드러납니다. 불순종의 아들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자기 자신입니다. 오직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순종의 아들의 중심에는 죽었던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채워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원합니까? 재물의 풍족함과 함께 건강하고 성공한 자식으로 인해 행복을 누리는 삶을 원하십니까? 하지만 이것이 불순종의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산자에게는 옛것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불순종의 아들로 산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순종의 자리에 있는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시각이 있는 산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리신 신자는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평가받기를 거부하게 됩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죽었던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온 마음과 관심을 두기를 힘쓰는 것이 신자입니다.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말씀만으로도 진노의 자녀인 우리에게 은혜가 얼마나 참되고 복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순종의 자녀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신 하나님의 일에서 은혜를 확인하시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과 다른 산자의 삶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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