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2.08.12 12:44

(23강) 복음에 어울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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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33-39http://onlycross.net/videos/nuk/nuk-05333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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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설교>

 

◉ 자기를 바라보는 자 ◉

 

자신만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여느 사람들보다 뛰어난 신앙을 갖고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들의 신앙생활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 같은 자부심과 자신감은 오히려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큰 걸림돌이었을 뿐입니다. 우린 성경을 통해서 자기 신앙에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복음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거부반응을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죄 사함은 중풍병자와 같은 사람이 아닌 신앙이 좋은 자신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또 예수님이 세리인 레위가 베푼 잔치 자리에 죄인들과 함께 하신 것을 보고 제자들을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는 말로 비방을 합니다. 죄인들과는 함께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거룩한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은 자신을 거룩한 의인으로 여기고 있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면 이들은 또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33절)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따라 철저히 금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금식은 경건생활의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하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더 철저한 경건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일을 정하여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위가 잔치를 베푼 날이 금식일 이었는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신다는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로 인정받았던 요한의 제자들과 자신들의 제자들은 금식한다고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크게 잘못하고 있음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에서 드러난 바리새인과 서기관, 즉 자기 신앙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비방과 비판을 일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며 천국과도 맞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천국을 지향하고 복음을 선포한다는 교회가 복음에 어울리지 않는 이 같은 행태를 일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같은 잘못됨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습니다. 이유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을 바라본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교회가 교인들을 그 같은 길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경건의 행위로 인정되는 행위를 강조하며 실천을 요구하고, 실천이 있는 사람을 신앙 좋은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에 결국 신앙의 중심에 인간의 행위가 자리하면서 서로를 비교하게 되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비방이 앞서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잘못됨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말하되 복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앞에 자신을 세워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의 시선만 생각하면서 사람에게 좋은 평가 받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자신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 의미가 아닌 형식에 치우침 ◉

 

금식의 문제로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34,35절)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대개 일주일 동안 베풀어졌다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치러지는 데 문제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는 바리새인들이 결혼 잔치 기간에도 손님들에게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비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든 규례대로라면 잔치기간에도 금식일에는 금식을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쁨의 잔치를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식을 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잔치가 끝난 후에 금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금식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마치 그들의 신앙이 금식을 위해 있는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신앙적 문제점인 것입니다.

 

 

안식일이든 금식이든 하나님이 세우신 규례 중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지만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행하라고 하신 의미를 알지 못하면 내용은 사라지고 껍질만 남는 것이 되지만 바리새인들은 내용보다는 껍질을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행위에 초점을 두게 되면 신앙은 항상 잘한 사람과 못한 사람으로 구분되게 됩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한 사람은 금식을 하지 않거나 그보다 적게 금식한 사람들보다는 분명 나아보이겠지만, 그보다 많이 금식한 사람이 있다면 그 앞에서는 자신의 금식을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더 나은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금식을 더 많이 행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신앙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게 되면 항상 비교와 함께 경쟁으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분명 자신을 바라보는 식의 신앙의 문제점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복음과 행함 ◉

 

복음이 말하는 구원의 근거는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이지 우리의 행함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복음이 지향하는 것이고 신앙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근거는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까?

 

 

신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자기 자랑은 절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고 계신 예수님 앞에서 주일성수, 금식, 기도, 십일조 등등의 자기 행함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를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 보다는 자신의 행함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일 뿐입니다.

 

 

복음에 어울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명 자기 행함을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에 어울리는 것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 죄에 대한 고백과 함께 모든 죄를 대신 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만을 증거할 뿐 인간의 행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만약 복음에 가치 있는 인간의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면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도 가능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 아니며 다른 종교의 경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금식은 밥은 먹지 않은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 58:6,7절을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이사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금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말이 귀에 익지 않습니까? 눅 4:18절에서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으셨던 내용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참된 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금식의 내용을 보면 금식으로 인한 자기 자랑과 비교와 경쟁이 없습니다. 오히려 약한 자와 함께 하고 그들을 돕고 나누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에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36절에 보면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새 옷과 낡은 옷을 대비하여 말씀하고, 37,38절에서는 낡은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가 대비되어 등장합니다. 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를 율법에 치우친 유대주의로 생각하고, 새 옷 새 포도주를 예수님의 교훈, 즉 복음으로 생각해 본다면 복음은 유대교의 율법적 교훈과 함께 할 수 없고, 또 어울리지도 않는 것임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묵은 것이 좋은 이유 ◉

 

 

그런데 39절에서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는 말씀이 마치 새것보다는 옛것이 좋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 교훈, 즉 복음이 옛 것보다 좋지 않다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는 오래 묵은 것이 맛있다고 합니다. 오래 묵을수록 맛있는 포도주라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새것은 당연히 오래 된 것보다 맛이 없다는 생각으로 멀리하는 인간의 습성을 빗대어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오래된 포도주가 맛이 있느냐 새 포도주가 맛이 있느냐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묵은 포도주가 낫다는 생각에 붙들려서 새 것을 배척하는 유대교의 형식주의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시면 교회가 왜 행함의 문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행함에는 자기만족이 있고, 눈에 보이는 성취가 있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새 교훈인 복음으로는 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하는 그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것으로 증거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묻히게 됩니다. 이것이 못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말하되 자기 증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하면 ‘아멘’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의 그 어떤 행함도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얼굴을 찌푸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끝까지 자기 행함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행함의 가치를 포기했을 때 누려지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행함에서 주어지는 만족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것을 원하지 않고 묵은 것만 좋다고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보다 자기 실천으로 누리는 쾌감과 즐거움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해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오셨고 또한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은혜의 나라에 어울리는 것이 자기 실천을 내 세워서 타인을 비방하고 무시하는 것인지, 또한 자기 자랑과 자기 우월을 나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받습니다. 우리의 행함은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 어울리는 신자의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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