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4.14 09:31

(56강) 강청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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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1:5-13http://onlycross.net/videos/nuk/nuk-11051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설교>

 

◉ 간청과 끈질긴 기도 ◉

 

본문은 한국교회가 기도에 대해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인용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인용하여 강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계속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끈질긴 기도’ 이것을 소위 기도 응답 받는 비결 중의 하나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끈질기게 기도하면 귀찮아서라도 응답해 주시는 분일까요?

 

 

사람들의 나쁜 습성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자기 편리한 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레고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꿰맞추어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모양으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꿰맞추어 자기가 생각하는 엉뚱한 신으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생각하고 만들어 낸 하나님의 모습 중의 하나가 끈질기게 기도하면 그 정성을 봐서 응답해 주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세상이 생각하는 신의 속성이 하나님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끈질긴 기도’를 말하는 이유는 8절에서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간청’이라는 단어를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말씀의 배경과 의미는 묵살한 채 특정 단어에만 붙들려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기 생각과 상식에 꿰맞추어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상식에 맞고 이해되는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자기 상식에 맞지 않고 자기에게 불리한 일을 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밀쳐내려고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 상식과 이해를 잣대로 하여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부터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한 ‘간청’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간청의 의미가 앞서 말한 것처럼 끈질긴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본문에서도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는 친구를 찾아와 떡 세 덩이를 꾸어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다고 할 만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친구는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고 하면서 떡 세 덩이를 꾸어 달라는 친구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줄 수 없다고 거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의 요구를 결코 거절할 수가 없는 입장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8절에서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떡을 달라는 친구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구대로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본문 어디에서도 떡을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친구에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요구하여 떡을 받아 내었다고 이해할 만한 내용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청이라는 단어는 ‘간절하고 끈질긴 요구’의 의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아들의 아들다움 ◉

 

그러면 본문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안에서 행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 자체가 아들의 자격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아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는 아들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지만 그전에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들의 아들다움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아버지가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아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고 그 뜻과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아버지의 뜻과 마음에 자기 소원을 두고 행하는 것이야 말로 아들의 아들다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만 생각할 뿐이지 스스로를 아들이라고 하는 자신이 과연 아들다운가에 대해서는 묵살한 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자신을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이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지난 시간에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주의 기도의 첫 시작이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라 부르고 기도한다면 주의 기도는 아들로서 하는 기도라는 뜻이 됩니다.

 

 

당시 제자들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도 기도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기도를 배웠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자신들도 기도를 배워 요한의 제자들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즉 이들에게 기도는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한 용도였을 뿐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의 아들이 할 수 있는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에는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 이름과, 자기 번성이 없습니다. 오로지 서로가 아들의 자리에서 아버지께 나오는 것만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이라면 자기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에 소원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만 생각해도 자기 이름을 위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은 아들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됩니다. 또한 아들이라면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자신을 배부르게 하는 것은 세상의 많은 양식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용서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용서로 자신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의 기도의 의미이며 오직 아버지의 아들 된 자만 할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기도를 근거로 할 때 여러분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교회 생활이나 봉사 등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자신 있게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주의 기도를 기준 한다면 감히 스스로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본문은 주의 기도와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정당한 요구 ◉

 

8절의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라는 말은 벗, 즉 친구라는 관계만 생각했다면 일어나 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도 함께 침실에 누웠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 떡을 준다는 것은 친구에게는 괴로운 일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친구가 이미 침실에 누웠을 시간에 와서 떡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경우에 벗어난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본문에는 떡을 달라는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친구라는 관계보다 더 강합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정당함입니다. 떡을 달라는 요구가 침실에 누운 친구를 괴롭게 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할 수 없는 것은 떡을 달라는 요구에는 정당함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간청함을 인하여’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즉 거절할 수 없는 정당한 요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간절히 청한다’는‘뜻으로 이해되는 간청’보다는 개역한글판에 번역되어 있는 ‘강청’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당한 일이기 때문에 무리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요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떡을 달라는 것이 왜 정당한 요구일까요? 떡은 여행 중에 찾아온 벗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행 중에 찾아온 벗은 나그네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떡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이해해야 하는 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행 중에 찾아온 벗은 어느 한 사람만이 대접해야 하는 벗이 아니라 그 마을 사람 전체가 대접해야 하는 벗이라는 사실입니다.

 

 

신 10:19절에 보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떡을 달라는 요구의 정당함이며, 친구라는 관계보다 더 강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육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육의 관계는 그 관계가 아무리 깊다고 해도 자신을 초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지 친구의 관계만 생각했다면 침실에 누운 자신을 괴롭게 하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인간관계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친분으로 맺어지고 함께 하는 친구라는 관계는 나 자신을 초월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신자는 그보다 더 강력한 힘에 의해서 하나 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성령을 주심 ◉

 

침실에 누운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임에도 일어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말씀의 관계입니다. 이처럼 말씀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즉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아버지께 나오는 것이고, 아버지는 말씀의 관계에서 아들을 만납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 있는 것이 아들의 아들 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마음을 두고 그 뜻에 순종하고 행하는 것이야 말로 아들 됨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아들 된 자로서 함께 하고 있다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거절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되어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서 수시로 나타나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아들의 모습보다는 단지 친구로만 대하는 인간의 관계일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고 서로 견제하기도 하고, 우월한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자신을 과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하고 포기해 버리고 인간의 습성을 서로에게 드러내면서 살아가면 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9,10절)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간절함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에게 있어야 할 간절함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마음을 두고, 그 뜻에 따라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간절함이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행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의 간절함은 당연히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자기 영광, 자신의 번성을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의 방법을 취합니다.

 

 

자신의 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오랜 시간 열심히 기도하기도 하고 매일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단지 친구라는 인간적 관계에서 대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그 뜻에 순종하며 행하는 것에 간절함을 두는 것은 인간의 본래 마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셔서 새롭게 된 마음일 때 가능한 간절함입니다. 그래서 아들인 신자에게 가장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이것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3절)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성령을 구하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일에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된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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