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5.12 10:06

(60강) 겉과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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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1:37-41http://onlycross.net/videos/nuk/nuk-11374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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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설교>

 

◉ 하나 될 수 없는 관계 ◉

 

본문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바리새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함께 하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대로 서로가 대립되면서도 양보할 수 없는 분명한 원칙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서로 마음이 하나 되며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복음이라는 원칙을 세워두고 계시고 바리새인은 율법을 자기들의 원칙으로 세워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율법, 이 두 원칙은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함께 하면 반드시 충돌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율법의 방식을 밀어내고 율법은 복음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를 제대로 깨닫는다면 복음과 율법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율법이 자신을 복음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바른 정신 안에만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율법 자체를 진리로 여겼고 따라서 구원의 중요한 원칙으로 굳건히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는 율법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초대를 받으셨으면서도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반드시 행해야 할 정결의식입니다. 만약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면 입으로 들어가는 입식이 부정해져서 그 음식을 먹는 사람 또한 부정한 자가 된다는 것이 그들의 정결 의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정결과 부정을 철저하게 구분하며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자가 되기 위해 애를 썼고, 그래서 정결해 질 수 있는 규례를 세워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정결의식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이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눈에 걸리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손을 씻지 않으신 예수님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겼을 뿐인데, 예수님은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39-41절)는 말씀으로 그들의 생각과 방식을 책망하십니다.

 

◉ 인간관계보다 중요한 것 ◉

 

본문에서 바리새인은 손을 씻지 않으시는 예수님에게 노골적인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들에게는 당연하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유대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규례를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이상하게 여겼을 뿐입니다. 아마 우리가 바리새인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의 상식이 있고, 그 상식에 따른 행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되면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과연 손님으로 초대받은 사람으로서 상식적으로 합당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까?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일하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무엇을 중심축으로 하여 형성된 관계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한 것은 어쩌면 유대 사회에서 이미 소문이 퍼져서 유명 인사가 된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사회적으로 힘 있고 이름 있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어 합니다. ‘내가 누구를 안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힘 있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갖게 되면 자신 또한 힘 있는 자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것 때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바리새인이 악하다는 생각으로 일관하기 일쑤이지만 만약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면 우리는 ‘초대를 받았으면서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느냐?’며 그를 비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복음적인 문제보다는 인간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인간관계는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로서의 관계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이 중심된 지체의 관계는 무시하고 인간관계만 앞세웁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 교회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복음이 중심된 관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 하나인 겉과 속 ◉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손을 씻고 음식 먹는 것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옳으냐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손을 씻고 먹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즉 자신의 정결 기준을 가지고 자신과 예수님을 구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그러한 구별 의식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구별 의식의 문제는 겉을 만드신 하나님이 속도 만드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겉과 속을 만드셨다는 것은 겉과 속은 서로 분리하여 구별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겉의 행동으로 인해서 속이 정결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바리새인의 겉은 깨끗이 합니다. 겉을 깨끗이 함으로써 외부적으로는 뭔가 정결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뿐입니다. 속이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하다면 겉은 아무리 깨끗이 한다고 해도 깨끗한 자라 일컬음 받을 수 없습니다.

 

 

겉과 속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겉과 속이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겉도 깨끗한 것이고 속이 더럽다면 겉도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온 몸이 깨끗하든지 더럽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을 어리석다고 하신 것은 자신들 속에 가득한 악하고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하고 겉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일 1:7절에 보면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대로 한다면 우리가 스스로 깨끗해 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손을 씻고 먹든 씻지 않고 먹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겉의 행동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겉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깨끗한 자가 된다고 생각한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 예수의 피를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속에 악독과 탐욕이 가득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멸시하는 것보다 악하고 탐욕스러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피를 멸시하는 것이 왜 탐욕으로 연결될까요? 그것은 겉의 행동으로 깨끗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구별로 이어지고, 구별은 곧 자기 우월에 초점을 둔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 속을 보라 ◉

 

예수님과 바리새인은 서로 다른 길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받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받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는 전혀 끼어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만 이루어진 깨끗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세계 안에서는 피의 은혜를 높이고 증거하는 것만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가 반드시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을 봤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이야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복음이고 자유야’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역시 겉의 행동에 초점을 두고 행동을 구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겉의 행동에 시선을 두기보다 여러분의 속을 들여다보십시오.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러분의 속에 가득한 탐욕과 악독이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눈에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이 나쁘기에 온 몸이 어두워 감추어져 있는 탐욕과 악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속에 감추어져 있는 탐욕과 악독을 보게 되며 회개하는 자로 예수님께 나오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은혜로 감사하는 그가 눈이 성한 것이고 온 몸이 밝은 자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탐욕과 악독을 보는 신자는 바리새인처럼 손을 씻고 음식을 먹으며, 어떤 정결 규례를 지킨다고 해도 그것으로 밝은 몸이라는 일컬음을 받을 수 없음을 잊지 않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늘 살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와도 겉의 행동을 두고 너와 나로 구별하지 않게 되고, 상대방의 행동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과 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았으면서도 얼마든지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을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속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속은 같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가 덮인 속과 은혜와 상관이 없는 속으로 구분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분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당연히 악한 나의 속을 피로 덮으시고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증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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