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2.22 11:14

(77강) 제사보다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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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1-8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201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 12:1-8 개정)

 

 

<설교>

 

 말씀대로 산다는 것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식이 혹 자신의 신자 됨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결국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의식이 있고, 또 말씀대로 살려고 힘쓴다고 해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점에 대해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가?’를 궁리하게 되고,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으려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안식일에도 해야 할 집안 일이 있고 일상생활도 있는데 그러한 것은 노동에 해당이 되느냐 안되느냐는 것입니다. 즉 노동의 범위, 또는 기준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기준을 정합니다. 물건을 옮길 때 노동에 해당되는 무게와 거리를 정하고, 본문에서 문제가 된 것처럼 추수라는 노동에 해당되는 행위 등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 남고자 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앙일까요? 오늘날에도 안식일 문제는 주일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기독교에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즉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는 주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주일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대 기독교가 유대인들의 안식일 법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주일을 지켰다고 여기고, 그것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20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본문 7절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제사가 율법을 의미한다면 자비는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 존재에 더 관심을 둠으로써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한 유대인 됨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을 그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말씀을 지켜 실천하고자 했던 의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신의 가치에 관심을 두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써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존재 가치가 지켜진다고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도 유대인들의 이러한 의도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안식일의 의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에 추수하여 탈곡을 하는 노동의 행위로 간주했고, 그것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에서는 충분히 비난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두 가지 예를 들어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는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부하 몇 명만 데리고 피신 중에 있었던 사건(삼상21:1-6)입니다. 다윗이 피신 중에 배가 고파서 성막 안으로 들어가 제사장에게 부탁해서 진설병을 얻어먹게 됩니다.

 

 

진설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으로써 성막 안 상 위에 매 안식일마다 제사장이 새로운 것으로 진열합니다. 그때 묵은 떡은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인데 다윗 일행은 안식일에 제사장이 아닌 신분으로 그 떡을 먹은 것입니다.

 

 

떡을 먹은 다윗이나 떡을 먹도록 한 제사장의 행위를 두고 본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규례를 어긴 것이 되지만 제사장이나 다윗은 그 일로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서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법에도 눈물이 있고 인정이 있다는 식으로 배고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묵인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이런 것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자기 입장을 내세우면서 심판의 부당함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예는 안식일에 제사장이 진설병을 교체하는 일을 하거나 희생 제물을 잡아 바치는 일을 하고, 또 그 일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노동을 함으로써 안식을 범하는 것이 되지만 죄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주어진 상황이나 직책에 따라서 용납되는 일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는 잣대가 돼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두 가지 예를 드신 것은 하나님이 안식일 규례를 주신 목적과 의미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이라는 날을 지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라는 거룩한 날을 지키는 방법이 가장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참된 자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교회가 안식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는 주일에 예배를 드림으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유대인처럼 하나님의 뜻과 마음보다는 말씀을 지키는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두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자신은 자연히 말씀을 지키는 거룩한 신자로 평가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 복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안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창 2:2-3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완성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할 만큼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모자람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안식이었고,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부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었을 때 안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은 더 이상 안식에 거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일 규례를 주신 것은 참된 안식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죽음을 이기고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그들 역시 애굽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재앙 아래 죽어야 할 존재였지만 어린양의 피가 죽음이 이스라엘을 넘어가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 안에서는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안식은 어린양의 피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규례도 어린양의 피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안식을 잊지 않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임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생각한다면 안식일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안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사가 아니라 자비

다윗이 성전 안에서는 율법 주항에 매이지 않는 것처럼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조항에 매어 살지 않습니다.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조항을 실천하는 우리의 행함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의가 되어서 우리를 흠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자비입니다. 신자는 이 자비 아래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비의 세계인 예수 그리스도 안이야 말로 아무 부족함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을 보면서 자기에 대해 못마땅해 합니다. 실천이 부족하고 열심히 부족하다면서 구원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불안한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안에서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이 됩니다. 물론 안식은 없습니다. 아무리 주일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해도 그것은 안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출 31:14-15을 보면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규례에 의해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마치 죽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고 하셨으니 그러한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규례를 빈틈없이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세부조항을 만들어 실행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고 하신 것은, 안식일에 일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자신의 수고와 노동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에 해당된다는 의미였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주일이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되어 있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주일을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여기는 시각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이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기 때문에 ‘주일 지키는 나는 신앙이 있다’라는 시각으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주일 예배에 빠지게 되면 신앙에 문제가 있거나 죄를 범한 것으로 여기고 마음에 불편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도 주일에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의미로는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맛보고 아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자비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 아래서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그러므로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도 주일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더욱 깊이 알아가고, 자비의 세계에 참여됨으로 안식을 누리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제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아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여러분이 주일을 지키고 그 외에 실천하는 모든 행함보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행함이 의가 되고 그 의가 우리를 죄에서 건지고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의, 즉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가 믿음을 자신의 실천으로 여기는 것은 믿음에 대한 큰 오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어떤 율법 조항도 메고 있지 않습니다. 신자에게 메어진 것은 자비라는 예수님의 멍에일 뿐입니다. 그러나 자비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도 멍에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비 안에서 신자는 이미 흠 없는 존재로 세움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다만 자비의 세계에 참여된 것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자비의 세계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싶은 마음으로 살 뿐입니다. 그 마음이 여러분을 오늘 이 자리로 이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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