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1.11 20:42

(71강) 요한의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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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1-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1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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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도 동영상 앞부분이 약 12분 정도 녹화가 안되었습니다.

녹화 안된 부분은 음성파일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녹화장비에 이상이 있는 것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본문>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1-6  개정)


<설교>


 의문은 당연한 것

 

누구든 하나님에 대해서는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도 천국에 대해서도 완전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 안에서만 존재하시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 안에 존재하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의문이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는 아무 의문이 없어야 바른 신앙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의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문을 드러내지 못하고, 마치 다 알고 다 이해하고 다 믿는 척 해야 한다면 교회는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맹목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도 의문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것 때문입니다. 왜 그런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를 죄악으로 간주하기에 억지로 의문을 삼키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면 믿음을 성령의 역사나 은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님에 대해 의문이 전혀 없었을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잉태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아들을 가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모세 또한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쳐서 이드로의 양떼를 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라고 의문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할 수 있을만한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욥도 한순간에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어버리고 자신 또한 질병으로 심한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어서 의문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의문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해 완전한 지식과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어두울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의문은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다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매우 뜻밖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이 곧 천국이 임한 것이며,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실 그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라는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알았던 예수님이 자신이 기다렸던 그리스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요한은 옥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듣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2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듣고’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굳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들었을 때 자신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일과 어긋남으로써 의심이 들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4:12절에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4:12절에서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한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4장만 본다면 12절의 내용은 쓸데없는 사족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옥에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면 그를 구하러 가신다든가 무슨 조치를 하셨다는 내용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치 전혀 모른 사람의 일처럼 갈릴리로 가셨을 뿐 옥에 갇힌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신 예수님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비겁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4:12절만 본다면 사족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배경으로 해서 본다면 4:12절은 결국 요한이 천국과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문을 드러내고 가르쳐 주기 위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이 와서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기대한 것 같습니다. 그가 알았던 예수님은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한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당장 세상을 심판하고 천국을 실현하는 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옥에 갇힌다고 해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요한은 3:7절에서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말을 외쳤고, 10절에서는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는 말을 했습니다.

 

 

결국 요한은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요한이 말한 심판이 조만간 이루어질 것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옥에 갇혀있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옥에 갇힌 자신에게 들린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도무지 자신이 생각했던 그리스도의 일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요한의 생각대로 예수님이 심판자로 오신 그리스도라면 세상을 뒤 흔들어버릴 만한 놀라운 일들을 벌리셔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같은 족속들은 모두 찍혀서 불에 던짐 받는 심판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심판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로 알고 있던 예수님이 자신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른 일을 하고 계시자 정말 그리스도가 맞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여러분은 요한의 이런 혼란과 의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러한 말에 대해 전혀 의문이 없습니까?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에 대해 단 한 점의 의문도 의심도 없습니까?

 

 

여러분이 억울하게 옥에 갇힌 상황에서, 그게 아니라면 생각지도 않은 손해와 실패를 맛보면서 예수님이 자신을 구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또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의 실마리는 전혀 보이지 않고 고통은 계속 될 때 그래도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 의심 없이 믿으실 수 있습니까? 이것은 천국이 무엇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명확히 알았을 때 가능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형편과 상황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의 세계를 누리는 천국에 머물러 있을 때 그러한 믿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11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만약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가진 상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목격했다면 과연 예수님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아마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혔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이 죽으실 때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제자들의 행보도 예수님을 알지 못한 인간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면 내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예수님이 가신 길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알게 되는 복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5절)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 분이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는 일은 생명의 사건입니다. 세상이 볼 때 맹인이나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 문둥병자, 이런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요한이 외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천국과 상관이 없고 오히려 심판에 해당된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에 의해 고침 받는 일이 있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일로 요한에게 전하도록 하시는 것은 요한이 생각한 그리스도와 실제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생각한 그리스도는 회개하지 않은 세상을 심판하고 천국을 세우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죄가운데 있고, 저주 가운데 있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생명의 사건을 일으키시는 문으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심으로 천국이 임했다는 증거는 생명의 사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의문은 요한의 잘못된 천국에 대한 생각,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과 자신이 기대했던 예수님의 일이 일치되지 않음으로 의문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의문이 있다면 그 역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이유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요한이 옥에 갇힌 상황에서 예수님을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로 생각했다면 자신을 옥에서 구해내실 것이라는 기대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자기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자 의문이 든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대해 의문을 가지는 이유도 이것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 구원과 상관이 없는 예수님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예수는 자신을 구원해주는 예수입니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서 건져주시고 자신의 일을 도와주시는 예수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로 가셔서 자신의 일을 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일을 하실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와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했던 존귀한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사건입니다.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얻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사건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죄와 저주에 갇힌 나를 피로써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의문은 예수님의 이 용서로 해소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기대하고 원했던 일보다 더 존귀하고 가치 있는 선물이고 은총이라는 것을 안다면 신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의 용서 하나로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죄에 갇혀 산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죄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실상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일으키시는 생명의 사건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이신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기보다는 나의 현실에 도움을 주는 예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됨으로써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신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로 오셨고 우리에게 생명의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가치를 알고 기뻐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천국에 거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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