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3.22 19:49

(80강)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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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22-29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2222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마 12:22-29)

 

 

<설교>

 

◎ 바리새인의 말에 담긴 모순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화를 보면 뜻과 생각과 마음이 전혀 상이한 단절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의 소통될 수 없는 대화를 보는 듯합니다. 이처럼 단절된 관계에서의 대화는 소통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 어떤 선한 뜻과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시고 또 말씀한다고 해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선한 뜻과 의도에 대해서는 마음이 닫힌 채 오히려 배척하는 결과만 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의 안식일 논쟁에서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예수님을 죽이기로 논의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금까지 그들이 지키고 유지해 오던 생각과 신앙 방식, 전통을 훼손하는 위험인물로 간주 한 것입니다. 죄인을 가까이 하고 병자를 고치시는 능력의 일들도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능력자로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을 향해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며 무리들이 놀라자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24절)는 말로써 예수님의 능력을 귀신의 능력으로 폄하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하늘의 능력으로 인정을 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셨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 모두가 옳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능력을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말은 귀신도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귀신이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스스로 분쟁하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25,26절)는 말씀으로 그들의 말이 모순이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27절을 보면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리새인의 아들들, 또는 제자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가? 가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과 바리새인의 아들들이 귀신을 쫓아낸 것은 어떻게 다르기에 예수님의 능력은 귀신의 힘이고, 바리새인의 아들들의 능력은 하나님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도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실제로 귀신 들린 것처럼 발작을 하는 사람이 기도와 안수로 낫기도 하고 병이 나은 일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닙니다. 무당의 세계나 다른 종교의 세계에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의 그 능력의 현상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까요?

 

 

기독교 안에서 행해지는 것은 당연히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고, 무당이나 다른 종교에서 행해지는 것은 귀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으로 보면 되는 것입니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의 능력과 귀신의 능력이 서로 힘겨루기 하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잘못된 주장일 뿐입니다. 또한 예수님 말씀처럼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것인데, 귀신이 과연 그렇게 일하겠는가?를 생각하면 뭔가 모순이 있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 귀신 들려 사는 세상

바리새인들은 눈이 멀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것만을 대단한 능력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나 말을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상들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다른 종교, 즉 귀신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으로만 나타나는 능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의 질병과 장애를 고쳐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붙들려 있는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고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질병과 장애를 고치시는 것으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원인을 귀신 들린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원인은 모두 귀신이 들렸기 때문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몸에 장애가 없고 건강한 사람은 귀신이 들리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등장시키고 그를 귀신 들렸다고 말하는 것은, 귀신에게 장악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실체가 어떠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보지 못하고 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언어와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진리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체이고, 그것이 곧 귀신에게 장악되어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현실에서 구출하기 위해 오신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만이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신에게 장악된 자를 구출하여 자유롭게 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8,29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고 말합니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은 장애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귀신에게 장악되어 있는 자기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 귀신을 결박하여 쫓아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무당이나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단순히 육신의 장애나 정신적인 장애의 고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참된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참된 세계가 무엇인가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을 벗어나야 할 곳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잘되고 복 받는 것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귀신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관심도 없기 때문에 진리가 다가오면 밀쳐 낼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진리를 밀쳐 낼 수밖에 없는 내막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예수가 싫은 것도 ‘내가 싫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할 뿐, 그것이 귀신에게 장악된 현상임을 알지 못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복된 길을 추구할 뿐 고난의 길을 싫어하는 것도 귀신에게 장악된 모습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괜히 예수님이 싫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가 힘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고난은 생각하기 싫은 이유가 단지 ‘연약한 인간이니까’라는 말로 당연히 여기고 지나칠 문제는 아닙니다. 그 모두는 강한 자, 귀신의 장악 아래 있음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보고 살아가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세상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진리와 생명의 세계는 보지 못합니다. 진리와 생명을 향한 눈은 이미 감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생명의 말, 진리의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받는다’는 온통 육신이 중심이 되고 육신에 관심을 둔 말만 가득할 뿐입니다. 이것이 귀신 들려 살아가는 악으로 가득한 세상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상태에서 구출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인간의 복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이 꿈꾸고 소망하고 기대하는 자기들의 메시야를 기다리는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것처럼, 인간이 기대하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배척을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귀신이 쫓겨 나간 상태를 뜻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신자가 참된 진리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고, 그로 인해서 이 세상은 귀신에게 장악되어 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귀신이 활동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귀신은 결박당하여 쫓겨 가고 오직 성령만이 활동하고 역사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는 증거는 참된 진리와 생명의 세계를 보게 되고, 그 세계에 소망을 두게 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신자라면 세상을 힘으로 여기고, 세상에 소망을 두게 하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오직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면서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귀신이 쫓겨 갔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도 세상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귀신에게 장악된 나를 구출하고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실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선함이나 신앙의 열심 등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능력은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눈이 뜨인 신자는 구원의 내막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참된 구원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신에게 장악되어 살아가는 귀신 들린 자와 성령으로 인해 귀신이 쫓겨 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신자의 다른 점입니다.

 

 

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귀신 들린 자는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의 형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둠이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에 갇힌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강한 자를 결박하시고 우리를 빛의 세계로 이끌어 내시는 생명의 완성자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셨음을 증거하는 이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에 대해 무리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며 놀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귀신의 능력이라고 폄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다윗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위대한 영웅과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 볼일 없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추앙받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다윗 자손은 전쟁을 잘하는 영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는 영웅으로 불릴만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시 62:11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는 고백을 합니다.

 

 

또한 다윗이 어린나이에 블레셋의 거인과 같은 장수 골리앗을 대적하면서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고 말합니다.

 

 

다윗은 군대의 힘으로 전쟁을 한 것이 아닙니다. 칼과 창으로도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오직 여호와께 속했다는 믿음으로 전쟁에 참여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병자를 고치신 것도 성령을 힘입어 하신 일로 증거할 뿐입니다.

 

 

강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한 귀신은 힘을 추구하는 자로 살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강한 자를 결박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강탈합니다. 그로 인해 참된 힘은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알게 되고 진리에 눈이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말을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보이는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일하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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