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5.24 18:00

(88강) 가라지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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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24-3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3243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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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24-30)

 

 

<설교>

 

◎ 성경 해석의 중심에 내 구원과 교회를 두지 말라 ◎

 

현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이름하는 모든 것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교회에서의 활동을 신앙으로 인정을 하는 것이 현대 기독교입니다.

 

 

 설교는 항상 왕성한 교회 활동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고, 성경은 교인들에게 그것이 곧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임을 제시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이 됩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교회를 생각할 뿐이고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내 구원과 내 교회라는 욕구에 호응하는 인간의 말만 잔뜩 만들어 낼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입니다. 인간의 구원 욕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이 능력이 되어서 창조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모름으로 인해서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담긴 교회 활동에 대한 하나님의 보답의 결과로 구원과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인간의 종교적 의지나 노력이 구원에 있어서 무용지물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믿는 신자는 구원을 향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부인하면서 오직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게 됩니다. 이처럼 신앙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됩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된 신앙과, 내 구원과 교회가 중심이 되어 있는 종교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된 해석과 인간의 구원과 교회가 중심이 되어 있는 해석이 동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된 해석은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선포하면서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가 부각되지만 인간 구원과 교회가 중심이 된 성경 해석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변질되어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해석의 중심에 인간 구원과 교회를 두는 것입니다. 해석의 중심에 인간 구원과 교회를 두게 되면 성경의 내용은 예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구원을 향한 인간의 욕구에 호응하고 교회 운영에 도움이 되고 유리한 해석으로 나아가게 되고 결국 유치한 수준의 해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좋은 밭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자’라는 말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해석의 중심에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 인간 구원과 교회가 있다는 좋은 예가 됩니다. 이러한 설교에 십자가는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을 촉구하는 말만 있을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좋은 밭도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결국 나올 것은 좋은 밭이 되라는 촉구일 수밖에 없고, 좋은 밭이 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며 실천을 선동하고 그것이 개인의 구원과 복으로 다가온다는 말로 교인들을 묶어 두려고만 할 뿐입니다.

 

 

 

◎ 곡식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실 ◎

 

가라지 비유를 해석할 때도 이러한 점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가라지 비유가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 구원과 교회가 중심이 된 종교적 교훈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라지 비유는‘교회 내에 알곡이 있는 반면에 가라지도 있고 가라지는 결국 불에 태워 질 것이니까 가라지가 되지 말고 알곡이 되자’라는 말로 설교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교회 일을 방해하고 목사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으로 일컬으면서 교회를 위한 교인으로 존재하도록 촉구하는 말만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구절을 인용을 해서 원수가 가라지를 뿌릴 때는 사람들이 잠잘 때이므로 목사와 신자는 잠자지 말고 항상 기도에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전형적인 종교적 교훈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24절)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 비유로 말씀을 하는 것이지 교회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교회 아니냐’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천국의 속성을 가지고 나타날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신 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진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지 단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집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라지 비유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는 현대 교회의 실상을 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천국에 대해 증거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에 주지해야 합니다.

 

 

물론 현대 교회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가라지가 되지 말고 알곡이 되라는 교훈이 목적이 아니고,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가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통해서 천국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자 한다는 것에 주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면 가장 먼저 천국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부딪힌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한 천국은 곡식만이 아니라 원수가 뿌린 가라지도 함께 공존하여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38절을 보면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악한 자의 아들들도 있다는 뜻입니까?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함께 하는 것은 천국의 상태가 아니라 세상의 상태를 뜻합니다. 밭은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 밭에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함께 공존함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대한 우리의 고정된 생각, 다시 말해서 천국을 단순히 살기 좋은 곳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악한 자의 아들까지 함께 공존하는 세상에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중심으로 천국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가라지를 그냥 두시느냐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당장 뽑아 제거해 버리고 천국의 아들들인 곡식만 남겨 놓는 것이 진정한 천국이고 하나님다우신 일이 아니냐는 생각이 있기에 가라지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천국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만 남겨 놓으시고 이방인은 모두 심판하시는 분이고, 그 일을 위해 메시아를 보내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던 세례 요한도 죄인을 가까이 하고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일을 보면서 의구심을 갖기도 했던 것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28절)는 말씀대로 우리는 가라지는 당장 뽑아 버리기를 원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오히려 그들이 번성하는 현실을 납득하지 못하면서 ‘천국이 왔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실감을 못합니다.

 

 

그런데 왜 가라지를 뽑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곡식만 남겨 놓고 가라지를 뽑아 버리면 세상은 말 그대로 어둠은 사라지고 빛만 남는 천국이 될 것인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9절)는 말씀처럼 곡식이 뽑힐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가라지를 뽑는데 왜 곡식도 함께 뽑힐까요? 그것은 가라지와 곡식을 확연하게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가라지를 뽑는다고 하면서 곡식을 뽑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곡식과 가라지를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는 시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은 자신을 가라지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 만큼은 항상 곡식에 해당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가라지에 해당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자기 생각이 기준이 되어서 타인을 판단하고 그들을 가라지로 정죄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로 인해서 곡식이 뽑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 현재의 천국은 아름답지 않다 ◎

 

교인을 곡식과 가라지로 구분할 때 무엇이 기준이겠습니까? 항상 교회 내에서의 활동이나 윤리적인 삶이 기준이 되어 판단됩니다. 그러면 교회 활동에 게으르고 삶이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내어 쫓고, 교회에서의 종교적 활동에 부지런하고 윤리적으로 살아가며 소위 인격이 훌륭한 사람들만 교회에 모아 놓으면 그 교회는 어둠이 사라지고 빛만 찬란한 완전한 천국의 모습을 갖춘 교회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누구든 그러한 교회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시각으로 곡식과 알곡을 구분하여 판단하는 것 자체가 헛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간혹 교회에 시끄러운 문제가 생길 때 문제의 원인이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 사람만 없으면 교회가 조용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사람을 쫓아내는 것이 곧 교회를 위한 일이고 그것이 주의 뜻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그가 가라지일까요? 그렇다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알곡입니까? 알곡과 가라지가 그런 기준으로 구별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알곡은 다치지 않게 가라지만 구별하여 뽑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곡인지 가라지인지는 완전히 자라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뽑지 말고 그냥 두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심으신 천국의 아들들은 천국의 아들로 자라도록 함께 하시는 것이고, 가라지는 가라지로 자라도록 그냥 두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는 말씀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심으신 곡식이 곡식으로 자라도록 지키고 보존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 곧 천국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곡식은 곡식으로 자라가고 가라지는 가라지로 자라가는 것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악한 자가 활개 치는 세상을 이상하게 볼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악한 자가 보존되고 오히려 더 크게 번성하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 하나하나가 가라지의 악함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일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곡식과 가라지는 외형적인 삶의 형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것으로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한다면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모두 곡식에 해당되어야 합니다.

 

 

곡식에 해당되는 사람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이들만이 하나님의 곳간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심어 놓은 곡식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이 곧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선악을 판단할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선악을 판단한다고 해봐야 겨우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지식, 그리고 양심이 기준일 뿐입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행동을 선악으로 구분하여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속에 악을 숨기고 선을 가장하여 행동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입니다. 우리는 속에 악을 감추고 행동합니다. 이런 우리 자신을 선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악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판단은 마지막 때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에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된 천국이고 곡식입니다. 곡식이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가 곡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뿌린 곡식이라면 하나님에 의해서 곡식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하는 그러한 곡식으로 자라면서 가라지와 무엇이 다른가를 드러내는 도구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곡식으로 심겨진 신자는 세상처럼 외적인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있는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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