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7.12 08:00

(95강) 세례요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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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4:1-1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401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 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설교>

 

◎ 자기 생각과 판단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 ◎

 

인간이 자기의 생각과 의지와 판단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옳다고 판단하면서도 옳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다고 해도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판단대로 행동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한 대로 예수님이 고향에 돌아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사람들이 놀랍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고 그 가족들을 잘 안다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의 사람에게서 그처럼 놀라운 지혜의 말씀이 나온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지혜의 가르침이 예수님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것으로 몰아갑니다. 누군가의 지혜의 말을 듣고 그대로 표절을 해서 말한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지혜의 말씀을 듣고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그대로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외적 조건에 의해서 예수님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말씀에 놀랐으면서도 놀란 마음 그대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한계를 드러내면서 살아갑니다. 즉 우리가 복음을 듣고 깨닫고 무엇이 옳은가를 알았다고 해도, 그 앎을 따라서 행동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계는 나라는 존재를 초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성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아무리 옳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해도 자기 존재에 위해가 예상되면 자기 속에 감추어 버리고 드러내지를 못합니다. 참된 복음을 들었다고 해도 그 말씀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즉각 반발하고 거부합니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인간은 복음을 듣지 않고 예수님을 배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요? 그것은 여러분의 짐작이고 느낌일 뿐입니다. 종교생활이 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예수 믿는 자로 여길 수는 있지만 실상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예수를 배척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한계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이어서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을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 세례 요한을 죽인 것은 ◎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이어서 세례 요한의 죽음이 등장하는 것은 세례 요한의 순교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요한이 무엇에 의해 죽었는가를 말함으로써 진리와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죽인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 또한 그것으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고향 사람이 예수님을 배척한 기사 다음에 세례 요한의 죽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해 누가복음은 간단히 얘기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에서는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한 일을 책망한 요한을 헤로디아가 원수로 여기며 죽이고자 한 것으로 말하지만(막 6:19) 마태복음에서는 헤롯이 죽이려고 한 것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태복음에서도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딸을 이용해서 헤롯에게 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을 죽이고자 한 주체가 각기 다르게 기록된 것은 마태와 마가가 동일한 사건을 두고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막 6:19-20절을 보면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고 싶어 했지만 죽이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말합니다. 즉 헤로디아는 헤롯 때문에 요한을 죽이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다르게 말합니다. 5절의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라는 내용을 보면, 요한을 죽이고자 한 것은 헤롯이고 그런데도 죽이지 못한 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으로 말합니다. 즉 헤롯이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헤롯에게 다른 사건이 없었다면 백성들을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요한을 끝까지 죽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기분이 좋아진 헤롯이 무엇이든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딸은 헤로디아가 시키는 대로 요한의 머리를 요구합니다. 딸의 요구에 헤롯은 근심을 하지만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요한의 목을 주라고 명하게 되고 요한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마가와는 다르게 얘기할까요? 그것은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건 다음에 요한의 죽음을 얘기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배척하고 장차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요한의 죽음을 통하여 말하고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죽인 것은 누구일까요? 헤로디아일까요? 아니면 헤롯일까요? 헤롯은 애초에 죽이고 싶지 않았는데 헤로디아가 딸에게 시킨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라면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인 것이 됩니다. 하지만 헤롯이 헤로디아 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면 되었는데 결국 헤롯의 지시로 죽었으니 헤롯이 죽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헤로디아와 헤롯 둘 다 요한을 죽인 장본인일까요? 분명한 것은 헤롯이든 헤로디아든 요한을 죽인 일에 가담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특정 인간에게 초점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을 죽인 것이 헤로디아든 헤롯이든 인간에게 초점을 두면 지금 우리는 요한을 죽인 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우린 헤롯도 헤로디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일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것을 바리새인, 제사장, 아니면 빌라도에게 초점을 두게 되면 역시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는 어쨌든 과거 예수님을 죽인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고백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들이 두려워 실행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을 잘 통치하여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을 평안하게 하고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로마 황제의 신임을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헤롯에게 두려운 것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선지자로 여기는 요한을 죽이지 못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헤롯의 위치에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은 자기의 생각과 의지와 판단대로 살아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항상 자신의 입장과 주변의 상황들에 의해서 끌려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까지 초월하여 요한을 죽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입니다. 헤롯이 자기가 맹세한 것을 어겼다면 함께 앉은 사람들, 즉 신하들 앞에서 왕으로서의 권위와 체면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 때문에 근심하면서도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요한을 죽이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원성을 산다고 해도 왕으로서의 자기 권위와 체면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존재성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결국 요한을 죽인 것은 자기 존재성이라는 인간이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자기 존재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요한의 죽음과 무관하다 할 수 없고, 예수님의 죽음에도 개입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도 자기 존재성이라는 악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도 제사장도 빌라도도 도망친 제자들도 자기 존재로부터 자유롭지 인간들이었고, 오늘 우리가 또한 그와 같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에 개입되어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

 

1,2절을 보면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고 말한 후에 요한의 죽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예수님과 요한을 동일 인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요한을 죽인 그것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일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나’라는 존재를 위해 삽니다. ‘나’라는 존재를 위해서는 복음도 예수도 거부하고 배척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게 우리들입니다. 교회 생활로 이러한 인간성이 달라지거나 약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처럼 어리석은 생각도 없습니다.

 

 

하와가 뱀에 의해서 선악과를 바라볼 때 이미 ‘자기 존재’라는 구렁텅이에 빠진 것입니다. 자기 존재라는 구렁이에 빠졌을 때 하와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자기 자신이 중요했을 뿐입니다.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생명보다도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구축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뿌리 깊은 본성이 교회 생활로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존재성으로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악의 세력의 힘의 위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결책은 인간의 성향을 개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알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위해서는 복음도 거부하고, 예수님도 배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아는 자로 예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찾는 마음이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때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착한 일 몇 가지 해 놓고 인생의 보람을 느낀다며 스스로를 뿌듯해 하는 우리에게 말씀을 들고 다가오셔서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죽인 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무릎 꿇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존재를 버리고 살 자신이 있습니까? 이것은 세상에 날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산 속에 틀어 박혀 수행을 해도 안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예수를 믿는다고요?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이 보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택하신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악한 자신의 존재성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높이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 가는 것이 맞습니다. 핑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백성으로 삼으시고 천국으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와 공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신자에게서 나올 것은 하나님의 열심과 수고를 향한 감사와 찬송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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