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8.02 19:02

(98강) 인간의 위선

조회 수 579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마 15:1-11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501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설교>

 ◎ 믿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없다 ◎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고, 배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돕니다. 위태로운 상황이 예수님으로 인해 해결되었으면 ‘예수님의 도우심 때문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상황이 해결된 것에 마음을 두는 것보다는 바람을 그치게 하신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신자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부는 바람을 그치게 해주시는 분으로 얘기하는 것은, 마음을 예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 인생에 큰 바람이 불지 않기를 원할 것입니다. 설사 바람이 분다고 해도 예수님이 그치게 해주시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바람이 있게 하시고, 바람과 함께 다가오시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불던 바람이 그치는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바람도 다스리시는 분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음에 다시 바람이 분다면 어떤 식으로 반응할까요? 예전에도 예수님이 도우셔서 바람을 그치게 해주셨으니까 또 그치게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렇게 되면 평생토록 바람이 그치는 체험이 있을 때만 예수님의 도우심을 생각할 뿐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마음을 두고 산다면 바람을 다스리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바람은 이미 예수님의 뜻에 주관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바람이 부는 것도 예수님의 뜻으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신자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에 개입될 것은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의 피 일뿐 다른 것은 그 무엇도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그치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을 때 그 곳의 사람들이 예수가 오신 줄 알고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병자를 모두 데려오게 합니다. 그리고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14:36)고 말합니다.

 

 

병자들이 나음을 얻는데 있어서 복잡하게 요구된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지켜야 할 다른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면 낫겠다는 믿음으로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개 하시기를 간구했을 뿐입니다.

 

 

옷자락에 손을 대면서 ‘예수님을 위해 헌신한 것도 없고 착하게 살지도 못했는데 옷자락에 손을 댄다고 나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신앙은 너무 복잡합니다.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에 인간에 의해 첨가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옷자락만 만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전통과 유전의 문제입니다.

 

 

◎ 계명보다 전통이 중요한 사람들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에게 나아와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2절)라며 항의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떡, 즉 음식은 손을 씻은 후에 먹어야 한다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의 문제였습니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어야 하나님 앞에서 정결과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더러워지는 것이고 부정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다는 것은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무리들이 손을 씻고 제자들이 나눠준 떡을 먹은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장로들의 전통이나 유전이라는 것은 관심 밖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게네사렛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생명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이 무시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계명을 무시하는 그들의 잘못됨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 부모에게는 달리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나님과 부모 양쪽에 드리게 되면 그만큼 지출이 많아지기 때문에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행위를 내세워 부모에게 드리는 것을 생략한 것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앞세워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는 자신들의 전통이 더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생략할 수 없는 신앙의 행위로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친 것이 부모에게도 바친 것으로 인정되는 전통이야 말로 그들에게는 돈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도 전통 아래 두게 되고 외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6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전통만 중요시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도 중요시하면서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장로의 전통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는 상관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계명에서 멀어져 있으면서 전통을 지킨다는 것으로 마치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7-9절)고 책망하십니다.

 

 

위선적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는 보지 못한 채 다만 장로의 전통을 따르면서 그것을 경건으로 착각하여 마치 참된 신앙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위선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전통에 매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신앙이란 명목으로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이 전통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예배할 때 정해진 순서와 짜여진 틀에 따라 예배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예배의 순서와 틀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에서 흘러 내려오게 된 전통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해진 순서와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전통적인 것을 무너뜨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통대로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이 신앙과 연관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를 어떤 순서에 의해서 어떻게 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듣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전통이 성경과 다를 때는 전통이 아닌 성경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통이기 때문에 없앨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보다 전통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전통을 행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시각으로 봅니다. 때문에 전통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바리새인, 서기관처럼 비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작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감지하지 못한 채 전통을 붙들면서 경건하고 거룩한 신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위선으로 자신을 가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이고, 오늘 우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사람은 본래부터 더럽다 ◎

 

 

10,11절을 보면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더러운 존재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살피고 구별하면 자신을 더러움에서 방지할 수 있습니다. 즉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거나 음식을 가려서 먹는 것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면 인간은 더러움으로부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들어있는 탐욕과 정욕 미움과 시기 등등의 증거물들인데 그것을 인간이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입에서 나오는 그것을 17절에서 “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누가 이 같은 것이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인간의 전통과 규례들을 앞세우면서 경건과 거룩한 자로 나서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더러운 자가 깨끗한 척하는 위선이며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악한 존재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율법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기 보다는, 인간의 손으로 또 다른 규례를 만들어서 자신의 선함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종교적 의식과 형식이 우리를 신자로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신자 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입니다. 더러운 우리를 거룩한 피로써 깨끗하게 씻겨주시고 죄 없다 선언하신 용서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자입니다. 여기에 어떤 형식과 의식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럼 예배는 무엇이고 기도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이 형식과 의식으로 되는 것인데, 그럼 예배도 기도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더러운 인간이 깨끗함을 입고 거룩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에 우리의 예배나 기도는 요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을 입은 신자가 은혜에 감사하고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한가를 더욱 깊이 알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깨끗해지고 신자답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깨끗함을 입은 신자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먼저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자 됨을 보이려는 전통적 의식이나 행위에 많이 매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는 흔적입니다.

 

 

우리는 형식으로 자신을 치장하려고 하지 말고 가장 먼저 우리 마음이 어떤가를 살펴야 합니다. 항상 나의 더러움을 바라보면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었다는 선언에 감사하면서 주를 부르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에는 옛적부터 행해오던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마치 그것이 성경적인 것처럼 오해되어 행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헌당식이라는 것도 그러하고, 장로 집사 권사 임직식에 교회에 일정 금액을 정하여 헌금하게 하고, 십일조 안식일 문제 등이 마치 성경인 것처럼 교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과연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장로의 전통에 매어 있던 유대인들은 자신의 의를 세우는데 열심이었을 뿐, 하나님의 의를 신뢰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인의 특성입니다. 이런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외친들 그것은 그들의 외식이고 위선일 뿐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외식과 위선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보다는 나의 의를 세우고 자랑하는데 열심인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과연 자신의 더러움을 자각하는 자로 나오는지 살펴야 합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마음 깊이 자각하는 신자라면 자기의 의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전통에도 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06
2010.02.22 471 마태복음 (77강) 제사보다 자비 신윤식 5941
2010.07.12 470 마태복음 (95강) 세례요한의 죽음 신윤식 5917
2010.03.15 469 마태복음 (79강) 피하시는 예수님 신윤식 5902
2011.10.23 468 마태복음 (156강) 양과 염소 비유 신윤식 5901
2010.10.04 467 마태복음 (107강)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신윤식 5900
2011.05.22 466 마태복음 (138강) 부활 문제 신윤식 5886
2012.12.09 465 누가복음 (39강) 혈루증 여인 신윤식 5876
2012.04.29 464 누가복음 (8강) 시므온의 찬송 신윤식 5874
2010.11.08 463 마태복음 (112강) 패역한 세대 신윤식 5866
2010.03.22 462 마태복음 (80강) 하나님의 나라 신윤식 5852
2012.04.22 461 누가복음 (7강) 목자와 영광 신윤식 5829
2010.03.07 460 마태복음 (78강) 안식일과 선 신윤식 5822
2010.07.26 459 마태복음 (97강) 예수와 유령 신윤식 5809
2010.09.27 458 마태복음 (106강) 교회 신윤식 5808
2014.02.09 457 누가복음 (96강) 나귀 새끼와 예수님 신윤식 5802
2011.03.06 456 마태복음 (128강) 인자가 온 것은 신윤식 5802
2010.01.11 455 마태복음 (71강) 요한의 의문 신윤식 5802
2010.08.02 » 마태복음 (98강) 인간의 위선 신윤식 5799
2010.12.05 453 마태복음 (115강) 천국과 어린아이 신윤식 5798
2011.02.27 452 마태복음 (127강) 품꾼의 불평 2 신윤식 578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