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2.26 19:36

(118강)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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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21-2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8212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설교>

 

◎ 문자적 해석의 오류 ◎

 

 

만약 성경을 문자의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 신자에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을 가르친다면 기독교는 많은 혼란과 비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보면 문자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일 성수와 십일조라고 할 수 있고, 교회에 대한 이해 또한 성경에 등장하는 성전이라는 문자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도 예수님의 오심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시각이 아닌 단지 병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셨다는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치유 사역이라는 비성경적인 활동이 마치 성령의 능력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자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경 전체를 일관성 있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문자적 그대로 해석했을 때 곤란한 결과가 예상되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의 내용 가운데도 문자대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기 곤란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가령 초대교회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던 것을 문자 그대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목사 자신부터 그러한 실천을 꺼려하여 입을 다물 것입니다.

 

 

막 16:17,18절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대로 믿는 자의 표적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방언과 병을 낫게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 성경을 문자적 의미로 해석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은 그냥 넘어가는 자기선악체계라는 구조에 머물러 있는 인간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해석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근거로 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 생명나무가 감추어졌고, 단절된 생명으로 향하는 문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열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근거로 해석하지 않으면 결국 인간의 의와 욕망을 위한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인간에게 무한한 용서는 가능한가 ◎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범죄한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도 문자대로 이해하고 적용한다면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쫓아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군가의 권고와 충고로 돌이키고 회개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제사장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이 권고하시고 충고하시고 그들의 죄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예수님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이 이방인과 세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불쌍한 자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서 용서가 가능하게 됩니다.

 

 

용서 이야기는 베드로의 질문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베드로는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가 갑자기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은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용서의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았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답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내용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이 내용에서 이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마 무한한 용서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게 죄를 범한다고 해도 신자는 끝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한한 용서는 사실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실천 불가능한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무한한 용서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 곧 문자적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자적 해석이 갖고 있는 함정입니다. 무한한 용서는 듣기에는 고상하고 이상적이며 사랑이 풍성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자기선악구조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설령 무한한 용서를 실천한다고 합시다.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범죄자들이 무한한 용서를 베푸는 것에 감동을 받아 변화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세상이 변화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죄에 대한 처벌이 없고 무한한 용서를 베푼다면 오히려 용서를 이용하여 마음 놓고 범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비록 실천을 할 수 없으나 무한한 용서를 가르쳐야 할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문자적 의미를 따라서 무한한 용서를 실천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 용서를 위해 죄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 ◎

 

 

예수님의 말씀이 무한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내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어느 한순간도 죄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죄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하나님의 용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용서하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대개는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면 자동적으로 용서해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그래 용서했다’ 이런 식으로 용서가 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용서는 자기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도 가능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용서 개념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죄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죄를 덮고 있는 의를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따라서 용서를 위해 하나님이 필히 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죄를 그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남으로써 인간은 용서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죄로 인해서 일말의 희망도 없이 오직 사망에 처해져야 할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로 인해서 죄가 가려지고 사망에서 건짐 받게 된다는 것이야 말로 용서가 얼마나 존귀한 은혜인가를 알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 용서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죄의 자리로 끌고 가시고 죄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는 말에는 자기의 의와 자존심이 살아있습니다. ‘용서를 일곱 번 실천하면 됩니까?’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이 이런 수준에 있음을 나타내고 싶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으로 자기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용서고 엉터리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다가올 때마다 인간은 ‘나는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지옥 갈 것 밖에 없는 악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 아래 있는 것이고, 용서를 아는 신자입니다. 이처럼 용서를 아는 신자는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까?’라는 베드로처럼 자기 의를 근거로 한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한한 용서를 실천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는 용서라는 의가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용서할 수 있다’는 자기 의를 근거로 질문하는 베드로에게 ‘인간에게서는 용서의 의가 나올 수가 없다’는 답을 하신 것이 됩니다.

 

 

대개의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악한 자인가를 모릅니다. 그 이유는 죄를 인간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향한 자기 행동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에 자기 악함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고 평가됩니다. 그래서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세상의 시각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가벼운 일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을 정도로 엄청난 화를 초래하는 악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자를 업신여기는 인간의 속성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아래 있는 인간됨 보다는 세상의 것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인간됨을 더 사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용서를 받은 신자가 모인다면 ◎

 

 

하나님께는 작은 자 큰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동일한 사랑 아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하는 형제를 나와 같은 동일한 존재로 보지 못합니다. 여전히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 자신을 악한 자로 보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용서를 받은 자는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반응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죄를 무조건 덮어주고 죄에 대한 처벌 또한 생략하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그런 것이라면 인간이 범죄했을 때 생명나무를 감추지 말았어야 하고, 남자와 여자와 뱀에게 내린 징벌 또한 생략하셨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는 ‘세상에서 범죄한 자를 무조건 용서해야 하느냐’와도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생각할 때 작은 자는 자신을 하나님이 용서가 아니면 지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악한 죄인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이야 말로 벌레보다 못한 존재임을 아는 그것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작은 자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작은 자를 업신여긴다는 그것이 곧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피의 희생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고, 이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는 베드로로 모이면 안됩니다. 베드로와 같은 생각으로 함께 한다면 결국 나오는 것은 ‘누가 더 용서를 많이 실천했는가?’라는 의에 대한 경쟁밖에 없습니다. ‘누가 더 큰가?’라는 비교와 경쟁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용서를 실천할 수 없는 우리의 속성과 악함으로 뭉쳐 있는 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악한 죄인이라는 존재로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가 근거가 되어 모이는 교회이며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신자가 모이는 그곳에 용서가 있습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 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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