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3.06 18:12

(128강) 인자가 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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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17-28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01728.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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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설교>

 

◉ 예수님이 오심은 항상 현재적 사건이다 ◉

 

세상의 역사에 가장 큰 사건은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오심이 단지 역사일 수 없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오심이 과거의 사건으로 멈추고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천년이 넘는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에서 단지 교리적이고 교훈적인 면만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생명력 있는 신앙으로 이끌어 가기 보다는 관념에 머물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과거의 역사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오늘도 내일도 매일같이 우리를 다스리고 주관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오셨던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나에게 오시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과거에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가신 예수님을 단지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매일 같이 영으로 오셔서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과거의 사건으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예수를 말하되 자기 홀로 살지만 매일 같이 영으로 오셔서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홀로 사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다스림과 간섭으로 바라볼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뜻보다는 주의 뜻을 묻고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들통 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살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으로만 가득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죽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오신 그 이유부터가 세상이 갖고 있는 코드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세상은 자신들과는 전혀 맞지 않고 다른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것으로 세상이 어떤 꿍꿍이속으로 하나님을 찾는지가 드러난 것입니다. 세상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살 뿐이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고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영으로 함께 하시는 현실을 사는 신자는 자신의 속셈이 들통 나는 것을 항상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경험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항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을 뿐이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고, 결국 믿음의 모든 문제는 주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인간의 속셈 ◉

 

 

인간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오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본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천국을 가르쳐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18,19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그 말씀대로 반드시 되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첫 번째 말씀에서는 베드로가 그리하지 말라며 강력하게 만류했고, 두 번째는 근심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없이 다만 천국에서의 자리 문제로 예수님께 청탁을 하고 그에 대해 분노하는 것만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시는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오직 자신들의 문제에만 몰두한 채 서로를 경계하고 경쟁하는 것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죽으심의 길임을 반복해서 말씀을 하셔도 제자들은 천국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더 높은 자리에 앉고 큰 상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속성의 충돌만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까지 했으면서도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위한 다른 속셈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이 아들들을 앞세우고 예수님께 와서 무엇인가를 구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각각 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으면서도 아들로서의 대우와 공경은커녕 사람들에게 붙들려 죽으셔야 하는 비참한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세계는 아예 사람들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는 서글픈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 모친은 자신의 아들들이 잘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아마 자식을 둔 여자라면 이 모친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여자가 자기 자식이 잘되는 문제를 초월하여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자에게 그것은 가장 강력한 욕망이고 소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 욕망은 남자보다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자에게 자식은 자신의 몸에서 자신의 고통을 수반한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 나라에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모친이 말한 주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는 다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주의 나라는 메시아가 오심으로 세워지는 유대 민족이 중심이 된 새롭고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이 모친 역시 그런 주의 나라를 기대하고 그 나라가 세워지면 자신의 아들 둘을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강력한 나라에서 주님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자리 둘을 자신의 아들들이 차지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현대 교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신자가 교회로 모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중심이 된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들어온 자들에게 있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정신이 살아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는 자리다툼과 경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로 여기는 장로가 되기 위해 다투고 경쟁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교회에 있다는 것은 교회가 어떤 세계인가를 전혀 알지 못할뿐더러 아예 관심도 없음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교회로 모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하고 거기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 예수님이 주시는 잔 ◉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답하십니다. 이들은 주의 나라에서 주의 좌우편에 앉는다는 것이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과 연관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은 고난, 즉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마실 수 있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다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한 ‘내 잔’은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과는 다릅니다. 만약 같은 잔이라면 제자들도 예수님이 받으신 잔, 즉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한 죽음을 받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장차 어떤 길을 가고 어떤 고난과 죽음을 당하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장차 마시게 될 잔은 예수님이 주시는 잔으로써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에게 임할 구원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마시는 잔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구원이라는 은총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예수님이 주시는 잔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잔은 제자들이 스스로 선택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셔야 마실 수 있는 잔입니다. 즉 구원이라는 은총의 세계, 주의 나라는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예수님의 소관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사항임을 말씀합니다.

 

 

좌우편에 앉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것이라는 얘기는 제자들 가운데 좌우편에 앉을 자는 이미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주의 나라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자들과 그 모친은 세상의 일상적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친에게는 자신의 두 아들이 가장 잘나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을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잘난 자는 높은 자리에 앉고 못난 자는 그보다 낮은 자리에 앉는다는 세상의 일상적인 사고를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잔을 마심으로 이뤄지는 주의 나라는 그러한 세상의 일상적 질서에 따라 통치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의 잘남과 못남에 의해서 자리가 결정되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높고 낮음의 자리가 따로 구별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큰 자고, 모두가 으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주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 섬김으로 된 주의 나라 ◉

 

 

두 아들을 앞세운 모친의 요구를 들은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에 대해 분한 마음을 갖습니다. 결국 모든 제자가 죽으심의 길을 가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고 오직 자기 문제에 대해서만 눈을 뜨고 있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크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제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성공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으로,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 다른 질서로 구축된 것이 주의 나라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 세계, 주의 나라에 속한 자로 이 자리에 모여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8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섬김을 받는 것이 마땅한 예수께서 도리어 죄인 된 우리를 위해 그 목숨을 내어 놓으시는 귀한 섬김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의 나라는 그러한 예수님의 섬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주의 나라에 속한 자로 모인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추구하고 큰 사람으로 섬김을 받고자 하는 방식을 그대로 갖고 나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망각한 채, 여전히 자기가 추구하는 세상의 질서 안에 머물고자 하는 것 밖에 안됩니다.

 

 

정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속성을 무시한 채 무작정 ‘섬기자’라는 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봉사하고 수고하는 섬김은 가능하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인간은 섬김을 실천한다는 자기 행동을 이용해서 자기 위치를 확보하려는 속성이 또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에게 섬김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신자 된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로 인해 우리에게 다가온 주님의 세계가 어떤 방식의 나라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오직 섬김이 능력이며 힘이고 크고 으뜸이 되는 자로 여김 받는 곳임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힘이나 세상의 것은 전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곳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 아래에서 해체되고 무너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있는 지금 모임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나라가 어떤 방식과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분명한 신자는 세상의 질서인 힘의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크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섬김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섬김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이 자신을 생명에 있게 했음을 알기 때문에 자연히 섬김을 추구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섬기라는 요구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이 우리를 섬김을 귀하게 여기는 삶으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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