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2.12.09 10:34

(39강) 혈루증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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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8:40-48http://onlycross.net/videos/nuk/nuk-08404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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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설교>

 

◉ 세상의 구원 근거 ◉

 

유대인은 구원의 근거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성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백성으로 택하셨고 그들만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유대인의 구원 사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주셨다는 것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율법 아래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존재로 여기며 죄 가운데 있는 더러운 인간으로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소위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의 그러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또한 나름대로 구원의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선’입니다. 세상이 생각할 때 인간이 선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아니고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한다는 논리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세상은 신의 정의나 공평, 사랑을 선한 인간을 대상으로 베풀어지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특정한 종교나 신에게 구원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고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의 선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결국 구원의 근거를 선에 두는 것입니다. 때문에 악한 자는 지옥 보내고 선한 자를 복 받고 천국 가게 하는 것이 가장 신다운 처사이며 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이 생각하는 악과 선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유대인과 세상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 근거의 공통점과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공통점은 인간에게 모든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이 자신들을 의롭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도덕과 윤리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의가 구원의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단지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장의 역할을 하는 분으로 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에 대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로 인해서 소위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는 것이 곧 멸망의 길이라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환영한 무리 ◉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가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말입니다. 문제는 구원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께 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의 말인가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고침 받은 이야기는 이러한 시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 해변의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십니다. 거라사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에게서 떠나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서 온전하게 고침 받은 것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키우던 돼지 떼를 예수님에 의해서 잃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고침 받은 일을 자신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긴 것이고, 단지 예수님으로 인해서 경제적인 손실이 발생했다는 것만 생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다시 돌아오시자 거라사 사람들과는 다르게 무리가 환영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불편하게 여기고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환영하고 따르고 기다리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이것만 보면 누가 예수 편에 있는 사람인가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교회는 분명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믿는 무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환영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의 환영을 받던 중에 자기 집에 와서 죽어가는 외동딸을 고쳐달라는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을 받습니다. 아마 회당장 야이로도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던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야이로가 예수님을 기다린 이유는 딸이 죽어가는 위급한 상황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는가에 대한 문제와는 상관없이 다만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해 기다린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주신 능력에만 관심을 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환영을 했던 무리들도 야이로와 같은 이유였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한 거라사 사람들이나 예수님을 환영한 가버나움 무리들은 하나같이 손익 여부를 기준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피하고 득이 된다고 생각되면 환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고 섬기고자 하는 이유는 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을 찾는 것이지, 불편하고 손해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신을 찾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믿음은 이러한 범위를 초월해 있습니다. 인간의 손익 여부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만 따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만을 추구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문의 넓고 좁음을 따지지 않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이 아닌 다른 이유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믿음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고 낙심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부정한 여인 ◉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중에 어떤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여인은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고 있었는데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많은 무리가 밀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접근하며 뒤에서 옷에 손을 댑니다. 그러자 즉시 혈루증이 고쳐진 것입니다.

 

 

여인의 혈루증이 고침 받은 것은 조금은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신 것을 보면 대개 고침 받기를 원하는 병자들의 요구와 함께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 행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 몰래 옷을 만졌고 그 결과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와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병이 고침 받을 수 있는가에 의문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병이 나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통해서 누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혈루증은 여인이 하혈을 하는 병을 말하는데 레 15:19-33절을 보면 이것은 불결한 것으로 취급되는 병이었습니다. 피의 유출이 있는 동안에는 그가 앉고 누웠던 모든 자리가 부정할 것이고, 그 자리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해진다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이 여인은 혈루증을 앓는 12년 동안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 또한 이 여인을 불결하게 취급하며 가까이 하지 않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몰래 옷을 만진 것도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규례대로 한다면 이 여인은 이미 불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나와 여인의 병이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옷을 만진 사람은 이 여인만이 아니었습니다.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많은 무리가 밀려들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예수님의 옷을 만지게 된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아니라 여인에게만 예수님의 능력이 나가게 된 것입니다.

 

 

부정한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혈루증을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인간의 부정함은 어떤 인간적 방법이나 수단으로도 해결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정한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거라사인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친 것을 목격했으면서도 그 같은 능력이 자신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귀신들리지 않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 때문에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떠나달라고 합니다. 지금껏 자신들 스스로 잘 살아왔기 때문에 예수 없이도 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반면에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혈루증 여인처럼 부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의 부정함을 고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환영하고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의 덕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이들도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애당초 구원과는 상관없이 예수님께 몰려든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서 예수님을 만졌지만 그들에게는 능력이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부정함을 알고 예수께 나온 사람만이 그 능력 아래 있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여인의 믿음 ◉

 

예수님이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하시자 여자가 예수님이 다 알고 계심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려 손 댄 이유와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합니다. 여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정한 자신을 깨끗하게 했다는 이 사실 외에 할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여인의 믿음으로 말합니다. 즉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부정한 우리가 깨끗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공로와 의는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딸아’라고 호칭합니다. 성경에서 딸은 시온, 또는 예루살렘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즉 고침 받은 이 여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21절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는 말씀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혈루증을 앓은 이 여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예수님과의 참된 관계에 속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자신의 부정함을 알고 오직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고침 받을 수 있음을 믿고 주께 나오는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신자는 자신의 수치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수치를 잊은 채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다렸으나 구원의 능력에는 관심이 없는 가버나움의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면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수치, 더러움으로 인한 부끄러움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나의 구원의 능력되심을 믿으며 인간의 의나 선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들여다보시면 도무지 믿음이 있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마귀의 유혹으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내 자존심과 배부름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부끄러움을 보게 하심으로 예수님만이 구원의 능력되심을 믿게 하시는 이것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예수님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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