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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0:10

(96강) 나귀 새끼와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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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9:28-40http://onlycross.net/videos/nuk/nuk-19284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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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설교>

 

◉ 세상과 성경 세계 ◉

 

사람은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싫든 좋든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에 순응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세상 구조와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비판 하고 불만이 있다 해도 결국 세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순응합니다. 세상의 방식에 도전하고 벗어났을 때 세상이라는 세계로부터 도외시되고 그것이 큰 불이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 방식에 길들여져 사는 사람에게 성경의 세계는 낯설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다가오는 것이고 결국 어렵다고 느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듣는 것이 현대 기독교인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경은 아무리 들어도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신자는 말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사실 딱히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성경은 우리가 길들여져 살아가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주어지지 않았음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은 종말이라는 말씀에 붙들려 있음을 알고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알고 우리 마음을 그 세계에 두기 위한 관심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가 이미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은 세상의 삶의 방식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생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사는 세상의 방식에서 보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서 보여준 행적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런 행적들을 단지 겸손이라는 말 한마디로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 큰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물리치고 피하시는 행적들을 단순히 겸손을 보여주기 위한 일로 이해할 수만은 없습니다.

 

◉ 나귀 새끼를 구하는 방식 ◉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기 위한 준비를 하십니다. 그것은 제자들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삶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성으로 그냥 들어가시면 될 일은 굳이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셔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그것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신자는 성경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에 마음을 두면서 예수님의 행적과 오늘 나와의 연관성에 마음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원하고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의 희생은 불필요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메시야의 희생으로 인해 나타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삶의 질을 고난에서 행복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믿음의 삶을 산 신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므나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와 연관이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것은 예루살렘에 이르셨을 때 생각하신 계획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슥 9:9절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것은 예루살렘의 길을 하나님의 말씀 성취로 증거 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귀 새끼를 구하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맞은 편 마을에 가면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것이니 풀어 끌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에게 말하지도 않고 무조건 끌고 오는 것은 도둑질과 같습니다. 만일 누가 ‘어찌하여 푸느냐’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라고 답하라고 하지만 이 역시 억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 말 한마디로 순순히 나귀 새끼를 끌고 가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귀 주인이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알고 있고 주가 쓰신다는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누구도 그 말 한마디로 나귀 새끼를 끌고 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상식입니다.

 

 

여러분이 제자의 입장이라면 예수님이 지시하신 방법과 말씀대로 실행하여 나귀 새끼를 끌고 오겠습니까? 우리의 상식과 방식을 앞세운다면 예수님의 말씀하신 방법에 뭔가 불안감을 느낄 것입니다. 누가 생각해도 예수님의 말씀은 억지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주가 쓰시겠다’는 말 대신에 상대방을 설득하고 자신이 곤란을 당하지 않을 다른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여 나귀 새끼를 끌고 옵니다.

 

 

이 내용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귀 새끼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스가랴의 예언을 생각하고 미리 나귀 새끼를 준비해서 예루살렘의 가시는 길을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왕이 임할 때에 나귀 새끼를 타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이 예언에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임하는지, 무엇 때문에 왕에게 어울리지 않는 약한 나귀 새끼를 타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그저 왕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있으되 말씀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주의 일을 계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나귀 새끼의 의미 ◉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겠지만 우리는 늘 내 입장에서 내게 유리한 예수를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내 믿음과 내 열심을 내어 놓으며 예수를 내 편으로 붙들어 놓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굳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로 무엇을 보여주시든 나는 나의 예수를 믿겠다는 것이고,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예수가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라는 자기 고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하고 나귀 새끼를 끌어옵니다. 그 임자들이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라고 한 것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의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 제자들이 할 것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장차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후에 제자들은 모든 일을 자기들 방식과 자기 뜻대로 행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그대로 따를 뿐이고 예수님이 증거하신 것을 그대로 증거하면 되었습니다. 결국 ‘주가 쓰시겠다’말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주가 쓰시겠다’는 말은 나귀 새끼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주의 일에 주가 사용하시는 도구가 될 것임을 미리 암시하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일에 주가 쓰신다’는 말조차도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제멋대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추구하는 일을 주의 일로 연결하여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주의 일을 힘쓰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귀 새끼의 용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나귀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예수님이 어떤 왕으로 오셨는가를 보여주는 용도였을 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끌려온 나귀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주 되시는 예수님이 사용하셨고 주의 일의 도구였습니다.

 

 

슥 9:10절을 보면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나귀 새끼를 탄 왕이 임하여 할 일입니다.

 

 

나귀 새끼는 힘이나 전쟁과는 거리가 멉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힘과 전쟁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 됩니다. 병거와 말과 활이 아니라 화평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이며 나귀 새끼의 용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단지 전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나 무저항주의자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이 추구하는 힘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며 따라서 힘과도 상관이 없는 나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는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을 보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세상 기준과 가치관 그대로 교회를 향한 욕망을 드러내며 그것을 주의 일로 위장하여 교인들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교회 확장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주께서 맡기신 사명이고 주의 일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결국 예수를 말하지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제자들이 기대하는 승리와 성취를 이루시기 위해 가시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를 자기 삶의 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예수가 누구신가를 증거하고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는 길로 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추구하고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대신 십자가가 그들 삶의 중심에 굳게 세워서 그들을 이끌어 가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시키신 일이 있고, 예수님이 지시하신 말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할 일은 다른 그럴듯한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행하고 시킨 말을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 예수님이 시키신 일이 시시하게 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고 자랑거리와 보람이 될 수 있는 좀 더 그럴듯한 일로 포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 찬양의 이유 ◉

 

37절을 보면 제자들의 온 무리가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보며 자신들이 본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고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은 차라리 그냥 걸으시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볼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예수로 인해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나타나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찬양의 조건이 아닌데도 기뻐하게 하고 찬양하게 하는 것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제자들의 생각이 기존 그대로였다면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로 인해 기뻐하고 찬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실망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이루도록 예수께 건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자들이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예수로 인해 기뻐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이 곧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기쁨과 찬양도 자신의 뜻과 원하는 일이 이루어짐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 인한 것이어야 하고, 우리에게서 그러한 기쁨과 찬양을 이끌어 내는 것이 말씀의 능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찬양을 바리새인들이 못마땅해 합니다. 그들의 눈에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여전히 찬양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존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붙들린 사람의 반응입니다. 세상 기준에 어울리는 가치 있고 위대한 일만이 찬양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일만이 주가 기뻐하시는 주의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말씀합니다. 돌들이 소리를 지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찬양은 그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그 찬양을 책망할 수도 제재할 수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찬양의 이유는 평화와 영광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하신 일로 인한 찬양의 내용과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원하고 기대하는 삶의 조건이나 형편과는 무관한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는 참된 해방과 구원을 경험한 신자에게서만 가능한 찬양입니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찬양이 있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능한 일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능한 일이 기쁨이 되고 찬양의 이유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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