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1.26 14:03

(73강) 신앙과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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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16-19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1161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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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 11:16-19)

 

 

<설교>

 지진과 하나님

사람들은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초초해집니다. 한번 사는 인생이기에 보람 있게 살다 죽어야 하는데, 뭔가 남겨 놓는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이 세월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마치 세상을 헛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아이티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같은 엄청난 재난 앞에서는 사치스러운 생각일 뿐입니다. 지진으로 건물들이 무너지고 수십만 명이 사상한 끔찍한 현실 속에서 과연 어떤 사람이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겠다는 느긋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재난에서 살아남은 것도 다행한 일이고, 지금 당장 하루를 사는 것이 급한 문제인 것이지 헛되지 않은 인생, 보람 있는 인생, 이런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은 지진으로 인해서 거의 폐허처럼 되어 버린 아이티를 바라보면서 불쌍하다고 하고 동정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구호물자와 봉사자들이 그곳으로 달려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것으로 인생을 보람 있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뭡니까? 아이티의 대지진이 아이티의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한쪽은 울고 있고, 다른 한쪽은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휴지 한 조각 내미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것이 지진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티는 80%가 로마 카톨릭이고 16%가 기독교, 나머지 4%는 부두교와 같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쨌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전체의 96%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런 나라가 수십만 명이 사상하는 끔찍한 재난을 당했으니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하나님을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재난과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십만 명이 사상하는 지진을 주시고는 ‘그래도 나에게 예배하고 감사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아이티를 위해 구호물품을 보내고 봉사자들을 보내면서도 ‘지진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하는 것도, 교회조차도 지진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 세대의 현실

19절 끝에 보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아이티의 지진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동원되지 않고 심심풀이로 장난삼아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이티의 지진도 하나님의 실수나 장난으로 하신 일이 그런 참사를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신 일이 됩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혜로 행하신 아이티의 지진으로 인해서 옳다함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신 일에 잘못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지진을 주신 하나님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을 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상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역시 세상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의 일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신자도 교회도 지진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지혜로 행하신 일도 옳다고 인정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선함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에 대해서만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신자들까지도 세상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을 행하신 하나님은 옳다고 하면서, 고통과 아픔의 일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반발하며 원망합니다. 이것이 세상과 함께 웃고 울며 살아가는 믿는 자의 현실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묻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요한에게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지혜의 일이 옳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또한 요한처럼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대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판단할 것이고, 결국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옳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대하며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6,17절)

 

 

이 비유를 많은 목사들은 목사가 설교를 해도 반응하지 않는 교인들을 책망할 때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신앙의 실상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 신앙과 놀이

이 비유를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놉니다. 피리를 부는 놀이를 하고 슬피 우는 놀이를 하는데, 피리를 부는 놀이는 결혼식 놀이고 슬피 우는 놀이는 장례식 놀이를 뜻합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면 다른 아이는 춤을 춰야 결혼식 놀이가 제대로 되고 재미있는데 춤을 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슬프게 울면 다른 아이는 가슴을 쳐야 장례식 놀이가 제대로 되는데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리를 불고 슬피 울면서 함께 놀자고 한 아이가 자기의 놀이에 함께 하지 않는, 즉 춤추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은 동무를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내용은 예수님이 천국의 복음을 전파해도 기뻐하지 않고, 죄를 책망해도 가슴을 치며 회개하지 않는 세태를 책망하는 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시고 죄를 책망하시며 결국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결코 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으시고, 죽음에 처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삶은 오직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오심이 한낱 놀이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놀이로 여기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생명보다는 세상의 복을 더 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위엣 것을 주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땅의 것을 달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데려가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나의 길을 가겠다며 버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앙은 생명이 아니라 단지 놀이이며 취미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선포하는데, 우리는 살기 위한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되고 아픔이 되고 손해되는 일이 주어지면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며 원망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종교 놀이를 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따라서 춤추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는다며 자신들의 놀이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 동무를 비난한 아이들은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놀이의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그것이야 말로 신앙을 놀이로 간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자기들의 놀이에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을 한 것입니다. 18,19절을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광야의 선지자로서 다른 유대인이 먹는 것처럼 먹지 않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생활하였습니다. 입는 것도 달랐습니다. 그 생활이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귀신들렸다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 속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하지만 손을 씻고 먹어야 하는 유대인의 규례를 지키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죄인의 친구로 지낸다며 비난을 했습니다. 이 역시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고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즉 자신들의 놀이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놀이에 함께 어울리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잘못됨을 드러내시고 신앙까지도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의 도구로 삼으려는 세태를 책망하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신앙을 자기 기쁨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예수를 배척하고 비난합니다. 예수라면 자신을 섬기고 믿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를 기준으로 해서 세상에 오신 참된 메시아를 판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 지혜의 일을 옳다고 할 사람

세례요한은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의 일을 보고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에게는 요한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메시아의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고서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일은 예수님이 흑암에 갇힌 자들에게 빛으로 오셨고, 사망에 갇힌 자들에게 생명으로 오셨음을 보여주는 지혜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지혜로 행하신 일을 보고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 기쁨을 위해 자기 놀이에 빠져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진을 일으키시는 일에 대해서도 이해를 못합니다. 인간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의 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고통과 아픔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엿보게 됩니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아픈 것 때문에 견디기 힘들고 그래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나의 생명을 위해 지혜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이 옳았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신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상식에 부합되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혜로 행하신 일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신자와 구별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은 종교 놀이가 아닙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의 놀이에 어울려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피리를 불 때 예수님은 춤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슬피 울어도 예수님은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기독교는 온통 놀이로 가득합니다. 종교 놀이고 교회놀이입니다. 기도원을 찾고 기도 응답받고 병 고치는 체험을 통해서 예수 믿는 맛을 즐기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귀를 닫은지 이미 오래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일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은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지혜로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그 옳음을 알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지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서 지혜로 행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옳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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