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3.29 21:26

(81강) 성령 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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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30-3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2303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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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0-32)

 

 

<설교>

 

◎ 세상의 형편

뱀이 여자에게 나타나 동산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고 오히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말을 합니다. 여자는 뱀의 말을 듣고 자신이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관심을 두고 나무를 바라봅니다. 그러자 나무는 평소와는 다르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이면서 여자는 열매를 남편에게도 주고 자기도 먹습니다. 이때의 그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상실되고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선악과로 인해서 하나님 같이 되는 자신을 향한 관심만 극대화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실상입니다.

 

 

인간은 사단에게 걸려 넘어졌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이 사단에게 걸려 넘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잠 4:19절에서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단에게 걸려 넘어진 인간은 자신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사단에게 장악된 상태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 1: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한 것처럼 빛이 와서 어둠을 비추고 어둠을 드러내어도 어둠의 상태를 보지 못합니다.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둠의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한 인간은 어둠이 무엇이고 빛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을 언급하며 빛을 증거한다고 하지만 결국 어둠 안에서 어둠의 모습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이것이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인간의 형편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인간은 하나님을 자신을 돕는 신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관심 밖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기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선지자처럼 하나님이 말씀하게 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어둠의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세상의 형편을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등장시켜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치료하심으로써 예수님이 곧 어둠의 권세에 갇힌 자의 빛과 생명으로 오셨으며 그들의 구세주가 되심을 보게 하시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즉 귀신들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기 백성을 고쳐서 참된 메시아를 보게 하시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기 백성으로 세상에 남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 성령 모독과 거역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치료를 귀신의 능력으로 치부하며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 대해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절)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예수님의 반대자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자신들이 원하고 기다렸던 메시아의 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유대사회에서 저주 받은 자로 규정된 죄인들과 문둥병자와 같은 병자들을 심판하시거나, 로마인들에게 대적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기에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이고,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오히려 흩어버리는 자입니다. 즉 성령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반대자, 또는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자라고 하면 도무지 그 죄가 사하심을 얻지 못할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고 공격을 하는 세력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어떤 죄도 용서에서 제외되는 경우는 없음을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성령을 모독하고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만큼은 이 세상은 물론이고 오는 세상에서까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령훼방 죄에 민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이나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교회 일이나 목사의 말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교회 일을 반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목사가 기도하며 하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 성령이 하는 일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말로써 신자를 협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말에 두려움을 갖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고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것은 성령을 힘입어 하신 예수님의 일을 귀신의 왕의 능력을 힘입어 한 것으로 여긴 바리새인을 향한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일을 보면서도 귀신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에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고,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며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가 고침 받은 것을 성령의 일로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그들이 붙들어 왔던 율법의 실천과 행함의 체계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어둠의 권세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시대는 뱀이 여자에게 다가올 때 이미 시작이 되었고 어둠의 상태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실천하며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고 자부하는 그것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고, 어둠에 있으면서도 어둠을 알지 못하기에 어둠에 갇힌 자를 해방시키시는 예수님의 권세가 자신들에게 생명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왜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까요? 모든 죄는 다 사한다고 하면서 왜 유독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것만큼 이 세상은 물론이고 오는 세상에서까지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일까요?

 

 

사람에 대한 죄와 모독을 용서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은혜로 알게 하고 예수님의 피가 곧 생명이 됨을 보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곧 생명임을 거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에게 죄사함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라면 예수님의 피가 곧 생명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고백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은혜에 인간의 공로를 첨가함으로써 은혜를 희석시켜 버립니다. 즉 인간의 행함, 실천과는 상관이 없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용서, 구원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것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말로 인자를 거역하는 것과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인자란 고난 받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만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저주에 갇히게 된다는 뜻인데,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과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왜 이런 엄청난 결과로 다르게 드러나는 것입니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신 뒤로는 다릅니다.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증거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나타내시고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인간의 의와 공로를 포기하지 못함으로써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의 나라를 원하기보다는 인간의 의와 공로가 인정 되고, 그에 따른 보상 또한 이루어지는 나라를 원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인간은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 성령의 사람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공로나 의와는 무관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는 공로와 의의 행함들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개입되지도 않은 것이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인간의 공로로 인한 상도 복도 약속된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보여주십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둠에서 구출하고 생명에 거하게 하는 그 나라가 곧 하나님이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령에 순종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공로와 의를 포기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의 은혜를 참된 은혜로 고백하면서 어둠에 갇힌 자신에게 생명이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을 보면 믿음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고 성령을 말하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 욕심을 위해 성령을 힘입어 행하신 예수님의 일을 반대하고 거절한 것처럼, 자기 욕심을 위해 예수를 찾고 성령을 구할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세상에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일을 보면서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게 되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감사하면서 인간의 의는 의가 될 수 없음을 자각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우리 앞에는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퇴장된 것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 앞에서 우리의 악함을 고발하면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고백하면서, 우리를 구출하시고 고치시는 예수님의 쉬지 않는 일하심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믿음으로 삽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어둠에 갇힌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곤고함과 불쌍함을 보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무조건적인 은혜를 보게 되는 것이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신들의 곤고함과 불쌍함을 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생명이신 예수님을 거절해 버린 것입니다. 자기에게 갇혀서 자신의 일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우리를 이 용서의 세계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하고 계십니다. 신자에게는 이 같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함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주장할 정당성은 없습니다. 애당초 죄 가운데서 태어난 것이 인간이고 저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행함을 근거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이 곧 어둠의 권세에 갇혀 있는, 즉 귀신들려 사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성령이 역사한 증거는 자신이 붙들었던 자기 정당성을 모두 놔 버리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하는 것이었으며, 저주에 갇힌 우리에게 빛과 생명으로 오시고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거절하고 예수님을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의 은혜를 아십니까? 그리고 감사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나의 정당성과 의를 포기한 자로 예수님께 나오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는 날마다 자신의 죽음을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가 생명이 됨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성령께 순종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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