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4.18 21:32

(83강) 요나의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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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38-45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2384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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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 12:38-45)

 

 

<설교>

 

◎ 인간이 굴복할 표적이 있을까?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한 미실이라는 인물은 ‘일식’을 미리 예고하는 것을 통해서 마치 자신이 하늘과 소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 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을 권력화 하여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늘의 노여움을 살 것처럼 여기게 함으로써 왕 보다도 더 강한 권위를 가지고 신라를 장악합니다. 왕도 하늘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데, 하늘과 소통을 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왕이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일식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식의 현상을 보고 신기해 하기는 하지만 놀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식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말 그대로 하늘이 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두려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해가 사라질 것을 예고하면서 그 날과 시까지 정확히 맞춘다면 백성들은 그것을 그가 하늘과 통하는 신적인 존재임을 보여주는 표적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 일식에 대한 예고는 천문을 연구한 사람들의 발표일 뿐이지 그 어떤 표적도 아닙니다. 일식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일식은 정해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임을 배워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할 수 있는 표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 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참으로 자신만만해 합니다. 아예 그런 표적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 나를 굴복시킬 수 있을만한 표적을 보여 보라’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은 열망으로 자신을 믿게 할 만한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믿지 않기로 작정하고, 믿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표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굴복시킬 만한 효과적인 표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놀라운 일이 있어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어떤 일도 그것을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없다고 작정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일도 우연의 사건이고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도무지 있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해도 ‘불가사의’라는 이름으로 분류할 뿐 하나님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지금도 우리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은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표적을 시시한 것으로 여기고 무시하기에 마치 표적이 없는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자신을 놀라게 하고 하나님을 믿게 할 만한 표적을 요구하지만, 그러한 표적으로도 인간은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보여주고 그 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 표적을 통해 믿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본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님께 표적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초자연적인 이적이나 징조, 또는 사건을 통해서 입증해 보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표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대인들이 죽지 않고 하늘로 간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것을 믿고 있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갈멜산에서의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표적을 생각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표적을 요구했든 예수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 중 몇을 태워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셨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했을 것이고, 하늘로서 온 메시아라는 것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39,40절)는 말씀으로 그들을 책망하실 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 대응했겠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 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불을 내려서 뜨거운 맛을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은 없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구원보다는 심판을 앞세운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아니라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악함을 책망하시고 예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 오셨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6장에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또 다시 표적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이 있어야 그것을 증거 삼아 예수님을 믿겠다는 인간의 완고함으로 뭉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싶은데 표적이 없어서 믿지를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유대 사회에서의 자신들의 존재와 위치를 모두 포기해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든 예수님을 민중들로부터 격리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일을 귀신의 왕을 힘입어 한 일로 매도 한 것입니다.

 

 

결국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표적만 있으면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빌미 삼아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서입니다. 표적을 보이지 못하면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들도 하나님의 능력과 상관없이 단지 인간이 행한 신기하고 놀라운 일 정도로 마무리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지 못하고 표적을 구하는 것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음란하다고 말씀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음란한 세대라면 성관계가 문란한 사회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표적을 구하는 것과 성관계가 문란한 사회가 서로 연관성이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음란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 8:41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에서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임을 생각해 본다면 음란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격하는 이방인에 속한 자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은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속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여줘도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분별할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더 놀라운 하늘에서 온 표적을 보여 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표적을 갈망합니다. 눈에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게 되면 더 굳게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표적을 통해 믿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표적을 믿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표적이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표적을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시고, 그렇게 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굴복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을 참된 표적으로 말씀합니다.

 

 

 

◎ 요나의 표적

 

 

요나의 표적은 40절에서 말씀한 대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요나에게 있었던 그 같은 사건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셨던 예수님을 보여주는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요나의 표적에서 사흘이라는 기간에 초점을 둡니다.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도 사흘 동안 죽음의 상태로 계시다가 부활하신 것이 곧 예수님이 말씀한 요나의 표적의 의미로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표적은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친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서 물고기 뱃속에 갇혀서 죽음의 상태에 있게 된 것이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해서 사흘 동안 죽음의 상태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요나에게 물고기 뱃속에서의 사흘은 자기 죄를 깨닫고 확증하는 표적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땅 속에 갇힌 사흘은 이스라엘을 죄를 보여주고 확증하는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일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데 마음을 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과 위치에만 마음을 두었을 뿐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 된다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신 일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반복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이러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을 주기 위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표적이 될 만한 신비한 체험을 원합니다. 뭔가 보게 되는 것이 있기를 원합니다. 무엇을 체험하고 본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주를 찾게 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를 알고 애통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체험과 표적을 더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대를 향해서 예수님은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41,42절)고 말씀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도 회개를 하였는데 요나보다 더 크신 이가 와서 말씀을 하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악한 세대를 정죄하는 말씀이고, 스바 여왕이 땅 끝에서도 솔로몬의 소식을 듣고 그 지혜의 말을 들으려고 왔는데 솔로몬보다 더 크신 이가 말씀을 하는데도 그 지혜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는 악한 세대를 정죄하는 말씀입니다.

 

 

니느웨도 스바여왕도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생명의 나라를 가져오신 전능자로 그들에게 임하시고 함께 하고 계시고 생명의 일을 표적으로 보여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거절하고 배척함으로써 그들의 악하고 음란함만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예수님이 보여주실 표적은, 그들이 끝까지 생명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 했다는 표적으로써 땅 속에 사흘 동안 갇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보여주는 표적의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표적을 알지 못한 세대는 청소된 빈집과 같습니다. 43-45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청소되고 수리된 집은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게 하시고 성전을 통하여 그들에게 함께 하심으로써 그들을 이방인에 비해 깨끗이 청소되고 수리된 집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깨끗하고 수리된 집으로 만드신 이유는 그들에게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도 그런 이유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앎으로써 긍휼과 자비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겨두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깨끗해진 자신들을 자랑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더러운 자로 멸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처음보다 더 악하고 더러운 상태로 말씀을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적입니다. 우리의 악함을 드러내는 표적으로 우리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신자는 십자가에서 악하고 음란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참된 표적을 보는 것입니다.

 

 

신자는 날마다 죄로 인해 죽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심령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따라 오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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