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5.03 09:21

(85강) 씨 뿌리는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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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1-9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30109.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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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 13:1-9)

 

 

<설교>

 

◎ 성경은 그리스도만 증거한다.

 

요 5: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지 인간이 아니며 또한 성경은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성경을 대할 때 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듣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고, ‘나는 과연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좋은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까지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증거하는 좋은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생각하는 좋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고상한 인격을 수양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사는데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내용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기대하는 ‘좋은 말씀’이 그런 수준의 것이라면 성경 어디에서도 여러분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을 해석한다는 사람들이 성경 내용을 마음대로 꿰맞춰 해석하면서 인간의 마음에 맞는 내용으로 변모시킬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성경에 대해 저지르고 있는 횡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상실된 인간의 말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한 말을 듣게 될 뿐입니다.

 

 

현대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들이 거의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도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신이 책임지도록 촉구하고 선동하는 말 일색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과 열심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선전합니다. 복은 그런 사람이 받는다고 하면서 인간의 열심을 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말만 난무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교회가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 인간에게 자생력은 없다.

 

본문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사고에서도 그 같은 모습은 예외 없이 드러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본문을 황무지를 개간하여 좋은 땅을 만드는 것이 곧 신자 됨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돌짝밭의 돌을 제거하고 가시밭의 가시를 제거해서 좋은 밭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신자가 밭을 갈고 씨뿌리는 농부로 묘사되고 있다면 그러한 말은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땅을 개간하여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이 농부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밭으로 묘사되고 있다면 ‘좋은 땅이 되라’는 말은 난센스고 코미디일 뿐입니다. 바보가 아니면 땅을 향해서 ‘좋은 땅이 되라’고 소리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현대 교회가 당연한 것처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아멘하면서 좋은 땅이 될 것은 다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난센스와 같은 말도 진리로 듣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돌로 가득한 땅을 향해서 ‘좋은 땅이 되어라’고 소리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겠습니까? 그런데 현대 교회가 그처럼 정상적이지 못하고 바보 같은 말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바보 같은 말을 하고 바보 같은 말을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살아있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말을 하고 듣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청중들을 살아있는 존재로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땅이 되라’는 말로 선동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좋은 땅으로 바꿀 수 있는 자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청중들도 자신을 살아있는 자로 인식을 합니다. 때문에 ‘그래 할 수 있어’라는 다짐과 각오를 가지고 목사의 말에 감동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간은 안된다’는 말에 필히 반발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할 수 있는데 안된다고 하니 인간을 무시하는 부정적인 말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생력이 없는 죽은 자입니다. 이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땅이 되자’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14: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말은 롬 3장에서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선을 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질 자체가 없음을 뜻합니다. 아예 선을 향한 마음이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성경은 죽은 자로 말합니다.

 

 

세상은 선을 도덕적 실천으로 생각합니다. 때문에 인간은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로 여깁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펼치기 때문에 성경이 도덕책으로 전락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으로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육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상을 찾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단절되는 것 자체가 곧 사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해서 특별히 가해지는 고통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것보다는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하여 힘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어 있는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스스로 좋은 땅이 되어서 떨어지는 씨를 받아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땅을 향해서 ‘좋은 땅이 되어 많은 결실을 맺으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예수님의 참된 가족에 대한 내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2:5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대개의 반응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예수님의 가족이 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가족이 되고 안되고는 인간에게 달린 문제입니까? 이러한 오해를 끊기 위해 등장한 것이 본문의 비유입니다.

 

 

 

◎ 좋은 땅은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이다.

 

본문의 비유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주의할 것은 땅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한 몇 종류의 땅에 관심을 두면서 돌밭과 같은 마음은 무엇이고, 가시밭과 같은 마음은 무엇이고 좋은 밭과 같은 마음은 무엇인가를 분석해서 결국 우리 마음을 좋은 밭으로 만들 자라고 결론짓는 것이 거의 전부이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무관한 해석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또한 한 형제라는 의식을 갖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친과 형제를 부인함으로써 참된 가족은 혈통으로 구성된 것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으로 새롭게 등장을 하는데,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새로운 가족은 오직 아버지에 의해서 탄생된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족으로 묶이는 것은 우리의 소관도 권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이기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묶으셨는가를 알고 하나님이 하신 그 일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도무지 신자 될 수 없는 사람이 신자된 것에 대해 놀라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서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자 하는 것이 참으로 부질없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좋은 땅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더 좋은 신앙을 가지도록 열심을 내라’는 말도 틀린 말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스스로를 고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좋은 땅은 우리 소관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길가와 가시떨기 돌밭은 인간의 본래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관심을 둠으로써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씨가 떨어져도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자’가 아니라 ‘우리는 열매가 맺어질 수 없는 상태의 마음을 가진 인간일 뿐입니다’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열매의 흔적이 보이면 ‘그것은 내 노력과 자질로 맺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맺어진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고,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인 것입니다.

 

 

좋은 땅은 돌이 사라지고 가시가 사라진 상태의 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좋은 땅을 가시와 돌밭과 다른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좋은 땅이라는 여건 때문에 열매가 맺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3절에 보면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인데, 신자가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따로 있습니까? 똑똑하고 학식이 높으면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까? 말씀은 인간의 지능이나 학식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역사하며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찾아가서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써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땅은 돌과 가시가 사라진 상태의 땅이 아니라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서 세상의 염려와 유혹과 환난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염려가 있고 유혹도 있고 환난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로 감사하는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유혹에서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로 감사하는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이 함께 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좋은 땅은 인간의 성품이나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성령이 함께한 신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귀 있는 자와 귀 없는 자가 나뉘게 되는 것이고, 귀 없는 자는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깨달을 수 없고 열매가 맺어지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됨을 알 때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왜 놀라운 복이 되는가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만 해당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신자는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이 다스리시면서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에 좋은 땅으로 존재하는 신자는 자신을 보지 않게 됩니다.

 

 

인간은 진리를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진리보다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육의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만 성령을 보내셔서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파고 들어와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아닌 영원한 나라를 보게 합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인한 열매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에게 천국을 향한 소망이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감사가 있다는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길가 밭이고 돌밭이고 가시떨기로 가득한 밭에 지나지 않는 우리에게 성령이 함께 하셔서 말씀이 떨어져 생명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엉터리지만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열매는 맺어집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의 역사를 믿으면서 내 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생명에 속하게 된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이고 그가 바로 좋은 땅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이 살아계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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