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5.17 13:58

(87강) 비유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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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18-23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318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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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18-23)

 

<설교>

                                           ◎ 잊지 말아야 할 인간의 본질 ◎

 

애당초 천국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천국에 해당되지 않고 오직 지옥으로 들어가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를 감춰버리시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지키게 하셨다는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생명나무에는 접근할 수 없으며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음이라는 저주에 갇힌 자가 되었다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에 이 본질에서부터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입이 닿도록 인간의 본질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질을 간과함으로 인해서 믿음, 복음, 천국, 열매, 구원, 등 모든 문제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간과한 사람들은 신앙의 문제들을 자신으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으로부터 출발을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자신에게 달린 문제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복음과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좋은 땅이 되자’는 교훈으로 일관하는 것도 인간의 본질을 간과한 해석입니다. 만약 여러분께 ‘효도르(격투기 챔피언)를 KO시켜라. 그러면 1억을 주겠다’고 한다면, 1억이 탐이 나서 효도르에게 도전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1억이 탐이 나기는 하겠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은 효도르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도전할 생각조차 안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좋은 땅이 된다는 것은 효도르를 이기는 것보다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로 표현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일관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춰 버린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스스로 생명나무에 접근해서 생명을 취할 수 없습니다. 즉 스스로 좋은 땅이 되어서 열매를 맺는 생명력을 가진 인간으로 달라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능력이 있게 되고 달라지고 새롭게 되지 않았는가?’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인간은 분명 새롭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심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어떠함을 알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생명이 아니라 저주에 갇힌 인간의 실상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생명의 존귀한 가치를 알게 되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저주에 갇힌 나를 구출하여 생명에 있게 하신 은혜의 분량을 깨달아 가는 인간으로 새롭게 달라졌다는 것이지 본질이 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을 씨 뿌리는 비유를 해석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길가 밭, 돌밭, 가시떨기 밭 ◎

 

예수님의 비유 해석을 보면 길가에 뿌려진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것은,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음으로 천국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흙이 얇은 돌밭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는 즉시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음으로 인해서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게 되면 곧 넘어지는 것으로 말씀하고, 가시떨기 위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서 결실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 세 가지 밭의 상태는 바로 우리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 상태를 우리 스스로 고칠 힘이 없습니다. 사단이 와서 우리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을 막을 힘이 없고, 환난이나 박해가 주어져도 말씀을 포기하지 않을 힘이 없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기고 말씀이 열매를 맺게 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 되라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간과한 억지이며 복음과 상관없는 선동적인 말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예수님의 말씀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 역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질? 도대체 그것이 뭔데?’ 어쩌면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몰라도 신앙생활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신앙생활이 모두 가짜라는 선언을 받고, 또 가짜로 판명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정성이 담긴 신앙생활을 가짜라고 하는 그 사람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쫓아내겠습니까?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지 못한 것은 인간의 본질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종교적 실천과 행함에 가려져 있는 자신들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생활은 누가 뭐래도 대단한 것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생활을 가짜로 판명합니다. 심지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그로 인해 붙들려서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과 나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그들에 비해서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초라하고 볼품이 없습니다. 외적으로 본다면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유대인은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우리는 영접했기에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영접했다는 그 예수가 가짜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여긴 것이 착각인 것처럼, 유대인과 우리가 다르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입니다.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본질을 보게 되면 다른 인간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너덜너덜한 걸레짝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좋은 땅이 되라고 하는 것은 돌을 향해서 금이 되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부디 이 말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고 마음에 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씨 뿌리는 비유의 해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께 모여든 큰 무리들을 향해서 ‘너희는 가짜다’는 선언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믿겠다며 예배당에 모여 예배에 참석한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가짜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냅니다. 평소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인간상이 복음이 주어짐으로 발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는 씨가 뿌려짐으로써 인간이 어떤 몰골로 존재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길가 밭, 돌밭, 가시떨기 밭은 씨가 뿌려지기 전에는 그 밭의 상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마음에 씨가 뿌려지기 전에는 인간이 어떤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가가 드러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평소에 자신의 양심과 도덕과 윤리로 포장된 나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말씀을 벗어나서 자신을 보게 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착한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열매를 도덕과 윤리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길가 밭은 뿌려진 것을 악한 자에게 빼앗깁니다. 씨가 뿌려지지 않았다면 악한 자에게 뿌려진 것을 빼앗기며 살아가는 상태인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악한 자가 뿌려진 것을 빼앗는 것은 뿌려진 씨가 그만큼 가치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한 자도 알고 있는 씨의 가치를 정작 밭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씨를 빼앗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빼앗긴다는 것조차 의식을 못합니다. 이러한 밭이 악한 자에게 대항해서 씨를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환난이나 박해에서도 말씀으로 인한 기쁨을 유지할 힘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잠시 기뻐할 수는 있지만 환난과 박해가 주어지면 기쁨은 사라지고 당장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며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신자에게 다가오는 환난과 박해는 인간이 스스로 말씀을 지키고 기뻐하며 살아갈 힘이 없음을 보여주는 도구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세상을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냥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이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고 삶에 대한 기대도 있습니다. 이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에게 끊어지지 않는 것이 염려고 유혹입니다. 이것을 이기려면 산다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사단은 인간에게 뿌려진 씨를 빼앗고 결실하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생명의 길을 방해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자기를 보면 그런대로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사단에 의해서 말씀을 빼앗기고 열매를 결실하지 못하는 비참한 자로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좋은 밭 ◎

 

그러면 결실하여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은 무엇일까요? 23절을 보면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이 있습니다. 결실은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었을 때 자연히 맺어집니다. 즉 땅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땅이 되어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되자는 말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열매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에게만 맺어집니다. 과연 말씀을 듣고 깨닫는 신자에게서 맺어지는 열매가 무엇일까요?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는 자신의 죽음의 자리에서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죽음의 자리 밖에서는 육신을 기준으로 해서 은혜를 평가하게 됩니다.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이 주어진 것을 은혜로 여길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 즉 저주에 갇힌 자가 자신의 실상임을 보게 되면 은혜는 자신을 저주에서 구출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에 의한 깨달음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의한 결실은 상한 심령이 되어 주께 나오는 것입니다. 너덜너덜한 걸레와 같은 자신의 속 실체를 보면서 도덕과 윤리로 포장한 채 그럴듯한 인간으로 행세했던 모든 것이 죄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생존에 붙들려 살아감으로써 말씀의 존귀함까지 무시한 채 염려와 유혹 속에 살았던 자신을 보게 되면서 천국 가겠다는 것까지도 욕망이고 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애통과 회개는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새롭게 탄생되는 좋은 땅입니다.

 

 

사 10:20-22절을 보면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패망하고 무너지지만 야곱의 남은 자가 있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생각의 전환을 뜻합니다. 자기를 친 자, 즉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거룩하신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것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애초에 남은 자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함께 함으로써 되어진 결과입니다.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능력만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즉 좋은 땅이라는 것도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여호와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들이 좋은 땅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남은 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남은 자에 해당되는 사람은 ‘좋은 땅이 되자’ ‘열매를 맺자’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이야 말로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는 생각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믿게 되고 그 의를 의지한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은 의에 대한 것이고, 자연히 자신의 의와 공로는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좋은 밭이며 좋은 밭은 말씀이 떨어짐으로 인해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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