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5.31 10:06

(89강) 겨자씨 누룩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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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31-33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3313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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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 13:31-33)

 

 

<설교>

 

◎ 은폐된 하나님 ◎

 

인간이 하나님을 사물을 보고 만지며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오감을 통하여 인식하고 확인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오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식되어지는 분으로 존재하지 않으시기에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답답한 마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 응답이나 치유 사건과 같은 경험이나 심적 느낌을 통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확신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경험이나 느낌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증거물로 여기면서 자기주관적인 확신에 붙들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오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을 곧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존재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자기 경험이나 느낌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응답이나 치유사건과 같은 인간의 경험이나 심적 느낌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기 확신에 빠지게 할 수는 있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자기 믿음으로 살아가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하나님의 존재만을 믿는다면 그것은 신의 존재를 복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세상의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자신을 세상에 계시하시지만 동시에 철저히 은폐되어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째로 외운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신다고 해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악하고 더러운 인간이 인식하고 알 수 있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은폐된 방식으로 계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은폐성을 예수님의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는 말씀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오직 허락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 뿐 허락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철저하게 은폐되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겨자씨, 누룩이 말하는 천국 ◎

 

하나님이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되어진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 역시 은폐의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보고 알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보고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은폐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를 우리에게 노출되어 누구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결론으로 이해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좋은 밭이 되어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고 가라지 비유를 ‘가라지가 되지 말고 알곡이 되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는 것이 바로 비유에 담겨 있는 은폐성을 알지 못한 결과입니다.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 역시 은폐성을 간과하게 되면 이 비유를 ‘세상에 임한 천국은 처음에는 적다가 점점 자라간다’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지상의 교회가 처음에는 적지만 점점 자라면서 확장되어 가는 것으로 얘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겨자씨 비유는 교회의 외적 성장을, 누룩 비유는 내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는 처음보다 점점 확장하여 지금은 전 세계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를 이런 의미로 이해하게 되면 자라가고 확장되고 커지는 것이 천국의 증거물이 될 것이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노출되어진 천국은 그것으로 은폐성은 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수단이건 방법이건 상관없이 자라고 확장되고 커지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역사하신 은혜의 결과로 여겨야 할 것이고, 반면에 자라지 못해 미약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밖으로 밀려나 있는 상태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천국은 우리가 상상하고 바라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임하지 않았습니다. 가라지가 함께 하는 것이 현재의 천국입니다. 가라지는 사단이 와서 심어 놓은 씨입니다. 즉 현재 사단이 활동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 활동을 허용하고 계시는 것이 현재의 천국입니다. 천국은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모습으로 임하여서 보고도 볼 수 없는 은폐의 방식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입니다. 씨만 보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가치 없는 씨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씨가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겨자씨를 보잘 것 없는 작은 씨로만 본다면 그것은 겨자씨를 잘못본 것이고 오해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겨자씨는 자라면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고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임한 천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한 천국을 무시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힘들게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어온 우리들에게 그럴듯한 천국이 주어지고 그 천국을 지금 누렸으면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사단이 활동을 하고 가라지가 함께 있는 모습으로 왔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천국이 우리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겨자씨를 바라보면서 아주 작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겨자씨가 갖고 있는 생명의 가치를 보지 못합니다. 자라서 풀보다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씨의 참된 본질을 보지 못하고 외적인 모습만 보면서 실망합니다. 신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자신의 생각이나 바램과 일치되는 현실에서 확인하고 싶어 하지만 드러나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혼란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소원과는 전혀 다르게 드러나는 현실의 참된 의미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자신들을 만족하게 하는 모습으로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천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척을 받으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을 만족하게 할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만족시켜 줄만한 분이 아니었고, 유대인들은 그 예수님을 밀쳐 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원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심판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은 그동안의 고통을 보상이라도 하듯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해준다면 누가 그것을 천국이 아니라고 하겠으며,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인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기대를 조롱하듯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셨고, 그 모습은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는커녕 실망하게 하는 것이었기에 배척을 받아 마땅했던 것입니다. 천국이 이와 같습니다.

 

 

누룩의 비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밀가루에 섞인 누룩은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찾아볼 수도 없게 숨어 버린 상태가 됩니다. 그렇지만 누룩은 분명 밀가루 속에 존재하고 있고, 그 증거는 밀가루가 부풀어 오르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즉 겉보기에는 똑같은 밀가루이지만 누룩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고, 누룩이 있는 것은 밀가루가 부풀어 오르는 것으로 증거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섞여서 함께 한다고 해서 그것을 우리의 눈을 보고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풀어짐으로써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죄인 됨을 고발하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애통해 하며 피 흘리신 주를 바라보며 자기를 부인하는 길을 감으로써 보이지 않는 미미하고 약한 것으로 여겨지는 누룩의 능력이 어떠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 신자가 증거할 천국은 ◎

 

인간이 기대하고 원하는 천국은 없습니다. 인간이 기대하고 원하는 천국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을 위하고 인간이 중심이 된 살기 좋은 복지사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행복을 천국에서마나 누리고 싶은 욕망이 인간이 꿈꾸는 다른 천국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천국이 인간이 기대하는 것과 같다면 인간의 욕망과 일치한 천국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천국은 자기 욕망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죄인줄을 알지 못하는 인간을 거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천국을 통해서 천국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이 또 다른 천국을 만들어 내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참된 천국을 밀쳐내고 무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가 보여주는 천국을 보게 될 때 신자는 예수님의 쉬지 않는 활동 안에서 천국을 맛보게 되고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욕망으로 만들어 낸 가짜 천국의 무너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현실은 참으로 미미합니다. 너무 미약해서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겨자씨와 같고, 밀가루 서 말 속에 섞인 누룩과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겨자씨는 큰 나무로 자라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누룩은 밀가루 서 말을 부풀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신자는 그것을 믿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천국을 현실에서 보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기대에 충족될 천국을 바라지도 마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세상이 무시하고 조롱하고 없다고 할 정도로 미약한 모습으로 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게 하는 사람은 그 천국을 보게 되고 믿게 됩니다. 겨자씨의 생명력을 믿는 것이고 누룩의 능력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후에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여전히 주께서 일하십니다. 이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믿는 내용입니다. 이 믿음대로 하자면 예수님의 오심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함께 하심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가 함께 하고 도와주는 사람이라면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주가 되신 예수님이 함께 하는 신자’는 어떻습니까? 이 말의 의미대로 풀이하자면 신자는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세상도,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말하는 신자 자신도 그렇게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항상 현실이 기준이 되어서 자신을 판단해 버리고 신자로서의 당당함을 잃어버릴 뿐입니다.

 

 

천국은 세상이 볼 수 없는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은 천국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이 세상에서 보잘 것 없고 작은 존재라고 해도 마음 두지 않게 돕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확대가 천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이미 완성에 머물러 있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완성되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은 것은 예수님이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작은 위치에서 무시를 받지만 실상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생명력과 능력으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밀가루는 가만히 있어도 누룩에 의해서 부풀어 오릅니다. 스스로를 부풀리려고 하지 않아도 누룩에 의해서 부풀게 되어 있습니다. 밀가루는 그것으로 누룩이 섞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보잘 것 없고 미미한 것에 담겨 있는 생명력과 능력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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