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8.16 16:00

(100강) 이방여인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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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5:21-28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5212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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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설교>

 

◎ 예수에 대해 의심하라 ◎

 

 

신자는 예수님을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 자체를 불신앙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목사가 강조하는 것도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께 ‘의심이 되는 부분은 얼마든지 의심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조건 믿는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의심을 묵살한 채 강제로 믿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함으로써 그 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도록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의심을 허용하지 않거나 무조건 믿을 것을 강요하는 수준에 있지 않습니다.

 

 

의심은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했을 때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안다면 의심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의미를 아십니까? 만약 모르신다면 여러분께는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상식에 근거한 예수님은 검이 아니라 화평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알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되면 주로 강조되는 것이 세상의 화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 검, 즉 전쟁을 주러 오셨다면서 우리의 상식을 뒤 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상식을 뒤 엎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도대체 사랑의 예수님이 맞는가?’라는 의심과 함께 혼란이 없다면 그것은 성경이 무슨 말을 하건 무시한 채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예수를 믿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셔서 이방 사람인 가나안 여인을 만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기에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며 소리 지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른 척 한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아예 상대를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청을 합니다. 시끄러우니 여인의 딸을 고쳐주시든 쫓아 보내시든 하라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시면서 이방인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도와 달라고 절박하게 애원하는 여인을 향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며 그 여인을 개로 취급하는 발언을 하십니다.

 

 

여기까지의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님다운 행동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님다운 행동이라면 가나안 여인의 부탁을 즉각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병자들에게 그래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방 사람인 백부장의 요청을 따라 그 하인을 고쳐주신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며 이방 여인을 무시하는 것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일과는 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 어떤 의문이나 의심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여인을 보내 버리라며 이방 여인을 무시하는 예수님의 행동에 동조하는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을 뿐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심이 있었다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분명 혼란과 함께 의문과 의심이 있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보면 분명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어쨌든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행동은 사랑과 자비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도 여러분께 아무런 의문과 의심이 없다면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누구신가에는 관심이 없이, 그리고 성경에도 관심이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를 고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방 여인을 개로 취급하는 예수님의 매정한 행동을 보시면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예수님에 대해 의문과 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길이 될 것입니다.

 

 

◎ 큰 믿음 ◎

 

 

예수님은 13절에서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심으신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는 지난 설교에 잠깐 언급을 하셨지만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을 만나시고 그를 통해서 아버지께서 심으신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장로들의 전통에 매이고 전통을 지키는 것을 믿음의 증거물로 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즉 뽑혀 버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함께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자신들이 하나님이 심으신 백성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외에 이방인은 모두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들이었고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뽑혀 버릴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심으신 것과 심지 않으신 것이 어떻게 구별되어 드러나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을 개로 취급하시면서 고쳐주시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개로 인정하는 발언을 합니다. 자녀로 대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개가 맞기 때문에 개로 취급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에게서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니 그 부스러기라도 허락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인에게는 자존심도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어떤 감정도 없습니다. 이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흉악한 귀신 들려서 고통당하는 딸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의지하고 믿을 다른 대상은 없었으며 오직 예수님의 도움만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여인이 딸을 고침 받기 위해서 자신을 개로 취급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은 개와 같은 존재임을 진심으로 알았습니다. 다만 개도 주인에게서 부스러기라도 받는 것이 있음을 말하면서 부스러기라도 원하는 그 마음을 예수님은 큰 믿음으로 말씀합니다.

 

 

 이 믿음은 유대인이 생각하는 믿음과는 전혀 다른 믿음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을 세워서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심으로써 유대인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님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했다면 자신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분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이 풍성한 분으로만 알고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주실 것을 기대했다면 매정한 예수님의 반응에 분노가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당신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한 예수라면서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가?’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이런 분노가 없습니까? 없다면 여러분이 기대하는 사랑을 풍성이 받고 있거나 아니면, 예수를 믿되 예수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예수의 도움 없이 나는 내 힘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자신은 예수님 앞에서 더럽고 개 같은 존재임을 알기에 사랑은 가당치도 않으며, 다만 예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불만도 분노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은 부스러기라도 그를 살리는 놀라운 은혜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 나는 개다 ◎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서 인간은 더러운 존재고 개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면서 사랑 하시는 예수, 사랑 받는 인간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내용이 그러한 예수를 부인하고 무너뜨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에 대해 전혀 의문을 갖지도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은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예수님에 대해 말하면 인간이 기대하고 알고 있는 예수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이상하다며 외면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와 일치된 예수를 말해주기를 요구합니다. 사랑을 베푸시고, 복을 주시고,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는 예수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사람의 입맛에 맞는 예수를 말할 뿐입니다. 이들에게 사람을 개로 취급하는 예수님은 생소할 뿐이고 삭제 대상일 뿐입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하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복에 대해서, 은혜에 대해서, 영광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신앙과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성경이 증거하는 내용으로 바르게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의 길을 걷게 되는 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의심 없이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식일 뿐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뽑히는 것이고,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모른다’는 부인을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충돌이 일어날 때 기존의 나의 생각이 무너지고 말씀이 세워지는 것은 신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나안 여인을 개로 취급하신 것은 그 여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더러운 존재고 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으로 예수님께 나온다면 가장 먼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물론 여인도 예수님께 딸을 고쳐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의 요구는 당당한 요구도, 당연한 요구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불쌍히 여겨달라는 긍휼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예수님이 아니면 고칠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진심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긍휼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과연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이것부터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인과 같은 절박한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다른 길이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원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있다면 자존심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더러운 존재라고 하고, 개라고 하고, 벌레라고 하는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눈살을 찌푸립니다. 비록 성경에 그런 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나에게는 적용시키지 말라는 암묵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전통 몇 가지를 따르는 것으로 신자의 의무를 다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복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이 심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참된 이스라엘의 믿음은 여인처럼 자신을 개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개이기에 예수님께 무시 받는다고 해도 당연한 것이고 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일을 겪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향한 그 마음은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다른 길이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오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고, 아무리 기도해도 예수님은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고통이 계속됩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대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개다’ 이 말씀에 대해 ‘예 저는 개가 맞습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에게서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으신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큰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어떤 일에서도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흔들고 괴롭게 하신다고 해도 ‘나에게는 주님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라는 믿음으로 변함없이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심으신 참된 이스라엘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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