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0.25 09:10

(110강) 변형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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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1-8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701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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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설교>

 

◎ 베드로의 체험 ◎

 

사람은 경치 좋은 곳이나 화려한 곳을 가면 별천지라고 감탄을 하면서 ‘여기서 평생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경치 좋고 화려한 곳에서 살면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요? 만약 경치가 좋다는 자연적 조건이나 화려한 집이라는 주거 환경이 행복의 조건이 된다면 그러한 곳에서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곳에서 산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만큼 사람은 환경과 조건에 집착을 하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처럼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것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습니까?

 

 

베드로는 그 장면을 보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절)고 말합니다. 마치 우리가 마음에 드는 경치 좋은 곳을 보면 ‘여기서 평생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처럼, 베드로는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보면서 마음을 빼앗기고 아예 거기서 살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베드로라면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여기 있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였을까요? 사실 베드로가 목격한 장면은 주변 환경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시면서 주변 환경까지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곳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변형된 예수님을 봤을 뿐이고, 유대인들에게는 영웅적인 인물로 대접받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목격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거기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변형사건은 별천지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세계를 목격한 것입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은 예수님의 영광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까지 등장한 것은 세상 어디서도 누릴 수 없는 영광을 체험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영광의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고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와 같은 체험을 했다면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이 나왔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변형되신 예수님을 목격한 것은 신기한 체험입니다. 하지만 신기한 체험이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간절히 원하는 것이 인생의 배부름을 누리는 것이라면 베드로와 같은 체험을 했다고 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 영광의 세계 ◎

 

 

예수님이 변형하신 사건은 베드로에게는 매우 놀랍고 신비하고 하늘의 영광을 체험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모세와 엘리야를 목격한 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나, 유대인인 베드로에게는 매우 놀랍고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알다시피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수많은 능력을 보이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갔던 영웅적인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과거의 인물이지만 무덤이 없는 신비로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세가 등장하여 변형하신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고 있는 장면은 베드로에게는 신비함을 넘어서, 영광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엘리야는 능력의 선지자면서 마지막에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리라고 약속된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것 역시 영광을 누리는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이 함께 한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한 것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도 초막을 짓고 거기고 살고 싶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어쨌든 베드로가 변형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목격했을 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은 오직 자신이 보고 있는 그것만이 최고의 세상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의 마음은 오직 세상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것처럼 다른 영광된 세상이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다만 육신의 세상에서 풍요로운 인생을 마음껏 누려보고 싶은 마음으로만 가득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체험한 세상에도 마음이 당기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성경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얘깃거리로만 치부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왜 그같은 체험을 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16:24-26절의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는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무척 당혹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은 십자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정확히 어떤 것인가를 모릅니다. 오히려 장래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따랐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목숨을 잃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혹해 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목숨을 잃는 것이 곧 찾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것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16:27절)는 말씀으로 증거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예수님이 변형하신 사건으로 미리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28절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는 말씀도 예수님의 변형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길을 가는 것은 맹목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자기 신념 때문도 아니고 사상 때문도 아니며 이념 때문도 아닙니다. 육신으로 사는 세상보다 더 영광되고 찬란한 세상이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도 거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즉 목숨을 잃는 것이 잃는 것이 아니라 영광된 참된 생명을 찾는 것임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자에게 임할 영광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제자 셋을 산으로 데리고 가셔서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 모두가 아니고 셋일까요? 그것은 신 19:15절의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는 말씀처럼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인으로 확정되는 규례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유대사회에서 장차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광의 세계를 증거할 증인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대해서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생각들, 장차 이루어질 그들이 원하는 영광의 세계가 예수님이 이루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나타내고 계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 ◎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세계, 어떤 영광의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어떤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까?

 

 

만약 십자가를 알기 전의 제자들처럼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되고, 그래서 장차 이스라엘이 중심이 된 세상에서 세상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는 기대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환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환상은 실제 하지 않은 상상의 세계일 뿐이고, 따라서 헛된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내고 욕망이 세워가는 거짓된 세계일뿐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변형된 예수님, 즉 예수님의 영광된 세계를 봄으로써 우리의 헛된 생각들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세계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보다 하나님이 이루실 세상에 더 마음이 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살고 싶고 내가 누리고 싶은 세상을 살게 해달라는 요구를 할 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5절을 보면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을 베드로를 위해서 그 같은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이 주를 따르는 것이고 제자들이 가야할 길임을 말씀하셨지만,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결코 낙심하고 절망스런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변형된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제 그 길을 감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증거해야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영광의 세계에 머물기를 원했지만, 다시 산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앞으로 자신이 본 영광의 세계를 추억 하고 자신이 체험한 것을 자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영광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는 것은 아들과의 관계에서 살아감을 뜻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변형된 예수님과 심지어 모세와 엘리야까지 목격을 했습니다. 거기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까지 체험을 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음성은 오직 아들의 말을 들을 것을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하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이 다가와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매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변형되었던 모습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목격한 것은 모두 거짓된 환상이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같은 세계를 보여주신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할 만큼 좋았던 영광의 세계보다 더 영광된 생명의 세계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신자는 예수님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심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신자가 보게 되는 것은 영광된 생명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눈으로 보는 참된 세상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현실에 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보기 때문이고, 결국 세상에만 모든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원한 영광된 세계에 대해 증거를 해도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반응이 있지 않습니다. 관심 밖일 뿐이고 육신의 영광을 누리는 세상에만 마음을 두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봅니까? 말씀은 예수님만을 증거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만 남게 합니다.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다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게 합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이 남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말씀 안에서는 영원한 세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신자는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계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안다면 세상의 영광은 초라하게 보일 것입니다. 세상을 이런 믿음의 시각으로 보게 된다면, 예수를 믿는 것으로 뭔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자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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