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1.28 18:43

(114강) 성전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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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24-27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72427.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설교>

 

신자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지 그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만약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십자가’를 안다고 하고 믿는다고 한다면 그는 교회를 출입하는 교인일 뿐 신자는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신자입니까? 아니면 의미는 알지 못한 채 십자가를 말하는 교인입니까?

 

 

아마 여러분을 신자가 아닌 교인이라고 한다면 심한 불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교인이라는 말이 여러분의 신앙을 묵살하는 용어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교인의 속성을 수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로 살지 못하고 교인으로 살았던 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출석하게 되면 자의든 타의든 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 기도, 헌금, 찬송, 설교듣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이것을 신앙과 연계하여 교인들에게 강조하고, 교인들 또한 자신의 신앙을 예배, 기도, 헌금 등으로 확인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십자가를 말하는 교인의 수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행위를 신앙의 증거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의로 여기는 모든 행위를 무너뜨립니다. 이 말은 자신의 행위를 의롭게 여기는, 즉 신앙적인 행동으로 여기는 시각을 바꿔 버린다는 것입니다. 가령 자신의 행위를 신앙의 증거물로 바라볼 때는 헌금을 해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헌금이 신앙의 증거물이기 때문에 많이 할수록 신앙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신자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받은 증거로 헌금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헌금이든 무엇이든 자기 신앙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가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두 번째 말씀을 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는 성전세로 인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전 세를 받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라고 시비를 건 것입니다.

 

 

출 30장을 보면 반 세겔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규례로써 20살 이상 된 모든 남자가 바치도록 되어 있는 성전 세입니다. 하나님은 이 반 세겔을 자신의 생명의 속전으로 여호와께 드리라고 하셨고, 그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에 바치는 반 세겔을 생명의 속전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구약 백성에게 성전은 그들의 죄를 속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백성은 죄를 속함 받기 위해서는 오직 성전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이스라엘이 성전을 소홀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 문제를 가볍게 여긴다는 증거고, 그것은 반 세겔, 즉 성전 세를 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성전 세는 성전을 유지하는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성전이 유지되는데 소홀히 하기 때문에 반 세겔을 바치는 일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죄의 용서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는 것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성전 세는 부자라고 해서 더 내고 가난하다고 해서 덜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반 세겔을 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의 죄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 세겔은 죄를 속하기 위해 성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강자와 약자가 없고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세가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내야 하는 의무적인 세금처럼 정착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성전 세를 내지 않는다면 유대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기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성전 세는 1년에 한 번 바쳤는데 예수님 일행은 그동안 여러 곳을 다니느라고 미처 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을 아는 성전 세를 받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희 선생은 성전 세를 내지 않았으니 내라’고 요구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두말없이 ‘낸다’고 하고 집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도 유대인으로써 성전 세를 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당연히 성전 세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25절)라고 물으십니다.

 

 

고대사회에서 임금은 그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세금을 받는 사람이지 바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임금의 아들 또한 세금을 받는 위치에 속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당연히 ‘타인에게서 받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들들은 세를 면한다’는 말씀으로 성전 세 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베드로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로 맺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곧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음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음을 안다면 하나님께 뭔가 바침으로써 아들로 인정된다고 생각하거나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성전 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해야 하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세를 내지 않으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임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마치 현대 교회가 헌금을 신앙의 증거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헌금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없고 재물을 사랑하는 행위로 간주됩니다. 헌금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 세를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의무적인 행위로 여기는 것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타인의 관계에 있는 자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처럼, 헌금을 신앙의 증거물로 여긴다거나 복을 받기 위한 수단쯤으로 생각한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지 않고 타인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타인의 관계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관계로 만듭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죽고 다시 사신 사건이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관계로 인도하는 영광의 사건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음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다면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철없는 아들이 요구한 대로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잘못됨을 책망하고 때로는 징계하시면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음을 아는 신자는 아들이 되거나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써 자유롭게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27절)는 말씀을 합니다.

 

 

아들들은 세를 면한다는 것은 아들은 성전 세라는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를 내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인해서 세로부터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만약 아들이 세를 낸다면 그것은 의무가 아니라 자유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 세를 받는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성전 세를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다고 해서 헌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서 실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는 여전히 헌금을 중요한 신앙적인 행위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헌금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세를 마련하는 방법이 아주 이상합니다.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의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 세를 내라는 것입니다. 왜 굳이 이러한 이상한 방법으로 돈을 마련하게 하고 그것으로 성전 세를 내라는 것입니까? 당시 제자들 가운데는 회계를 보는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회계를 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명목과 방법으로든 그들에게 들어오는 돈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가지고 있는 공적인 돈에서 성전 세를 내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에는 저에게도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내린 것은 성전 세를 바치되 거기에는 인간의 그 어떤 공로나 의도 포함 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낚시를 해서 건져 올린 고기에서 한 세겔을 얻는다는 것은, 돈을 얻기 위한 인간의 어떤 노력도 포함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그것을 성전세로 바친다면 ‘바쳤다’는 것이 자신의 공로나 의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애당초 내 노력으로 얻은 내 것을 바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헌금을 하는 것에도 이 같은 생각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낚시로 건져 올린 고기의 입에서 얻은 한 세겔처럼 내 노력으로 얻은 내 것이 아님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 것이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헌금하는 것을 신앙적인 행위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교회에 필요한 것을 담당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복음을 듣고 알게 하는 귀한 모임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하늘의 비밀인 복음을 들을 수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신자와 함께 교제할 수 교회는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여러분께 주어진 것으로 도우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의무라는 것이 없고 자유가 있을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께 주어진 것을 여러분의 노력으로 얻은 여러분의 것으로 여긴다면 아까운 마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 마음 또한 돈으로 살고자 하는 내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일 뿐입니다. 욕망을 간파할 때 신자는 다시 십자가에 죽으신 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복음을 위해 헌금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부요하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이미 부요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기쁨으로 헌금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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