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2.24 10:10

(50강) 칠십 인의 전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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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1-11http://onlycross.net/videos/nuk/nuk-10011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설교>

 

◉ 추수의 의미 ◉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칠십 인의 전도자를 파송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칠십 인의 전도자를 파송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도 전도에 대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복음을 전하자는 모범적 사례로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단순히 전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본문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2절)는 말씀에서 추수를 전도하여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으로, 추수할 일꾼을 전도에 열심인 신자로 이해하여 예수님께서 전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추수의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대개는 추수를 곡식을 거두는 의미로만 생각하여 전도하여 사람을 교회로 모으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추수는 사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여 알곡은 모으고 가라지는 버리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추수입니다. 따라서 추수하는 일꾼에게 필요한 것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이며 그 지혜가 곧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알곡과 가라지는 십자가를 기준으로 구별되기에 십자가를 안다면 자연히 알곡이 무엇이고 가라지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수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십자가를 알게 하셔서 추수하는 일꾼으로 사용하심으로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 둘씩 ◉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칠십 인을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십니다. 앞서 보내셨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 죽음에 앞서 칠십 인을 보내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둘씩 보내셨을까요? 이것은 전도할 때는 두 명씩 짝을 지어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전도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라기보다는 두 사람의 증언을 유효하게 여기는 유대교적 관습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 19:15절에 보면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한 증인을 한 증인이 아니라 두 증인이나 세 증인으로 확정하라는 이유는 한 증인이 만약 증언을 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는 바른 증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두 증인, 세 증인의 입으로 사건을 확정하라는 것은 증언을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한 취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중점은 인간이 그만큼 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대상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둘씩 짝을 지어 보냈다는 것은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라는 취지보다는 인간은 복음을 복음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얼마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인간도 죄를 용서해주는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 없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서 둘씩 짝을 지어 보냄 받은 칠십 인의 전도자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은혜는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자들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은혜를 나타내고 전달해야 할 사명으로 보냄 받은 사람들은 항상 죄인이라는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이 둘씩 보낸 예수님의 취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죄인 된 모든 인간에게는 구원과 생명이 되는 길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알곡이고 무시하는 자들이 바로 가라지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현실은 십자가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모든 의와 공로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절)는 말씀을 하십니다.

 

◉ 어린양과 이리 ◉

 

어린양은 예수님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의 모습으로 세상을 사신 것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은 어린양, 즉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가도록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길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힘으로 이기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힘없이 붙잡혀 죽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속성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속성은 절대로 손해 보지 않고 지지 않으려고 하고 내 것 챙기기에 바쁩니다. 결국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보내셨는데, 이리의 틈바구니에서 똑같이 이리처럼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이리와 어린양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갈지어다’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내신 분에 의해서 우리가 지금 세상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내실 때 어린양이라는 분명한 성격을 부여하시고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인생을 살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모습으로 존재함으로써 예수님의 추수를 보여주어야 하는 일꾼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신자의 참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성격이 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어린양의 길을 가신 것은 죄의 값인 저주의 길에 순종하신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어린양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알곡과 가라지로 구분되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아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의와 공로를 내세워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습성의 인간은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라지로 규정하기에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10,11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린다는 것은 이방인으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기준 되어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이 바로 이방인이며 가라지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전도자의 자세 ◉

 

예수님은 칠십 인을 두 명씩 보내면서 몇 가지 지침을 말씀하시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여행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라는 말씀을 보면 열두 제자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보내시면서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9:3)라고 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전대 배낭 신발은 여행을 위해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칠십 인이 보냄을 받은 것이 그들 개인의 즐거움이나 편안함을 위해서가 아님을 의미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의 추수, 십자가를 나타내는 일이 보냄 받은 전도자가 집중해야 할 일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는 말은 보냄 받은 전도자로서 할 일에 모든 마음을 집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전대, 배낭, 신발은 여행을 위해 필요한 준비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준비물을 갖추어서 편안한 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 때문에 여행의 의미와 그 목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좀 더 편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더 마음을 씀으로 인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의 뜻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의 뜻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을 믿음의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예수님의 추수를 위해 보냄 받은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하거나 예수를 믿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도는 예수님이 하고 계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예수님이 찾으시고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다만 예수님의 추수에 부름 받은 일꾼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나타내고 증거 하고자 하는 길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신으로 굳게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신자에게 굳게 세워져 있어야 할 이 정신이 여행에 필요한 준비물에 마음을 씀으로 희미해지는 것처럼 일상생활의 편안함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김으로 훼손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전도자에게 먹고 입는 것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뜻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로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7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목사가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전도자를 보냄 받은 신자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기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자신을 세상에 추수를 위한 일꾼으로 보내신 주인의 뜻에 마음을 두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 전도자로서의 삶 ◉

 

지금까지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면 보냄 받은 칠십 인은 목사나 선교사와 같은 특정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보냄 받은 모든 신자를 일컫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예수 믿고 천국가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믿음을 복을 받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전도자라는 신자의 본문에서 벗어난 것이며 게으른 것에 해당되는 것임을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신자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향해 간다고 생각하고 복을 받기 위해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천국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자세이며 이러한 자세로 사는 것이 십자가를 증거하는 길이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 전도자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셨다는 이 말씀이 강하게 그 사람의 마음에 자리한다면 자연히 그 사람은 자기가 살고자 하는 인생보다는 자신의 보내신 예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리의 세계에서 어린양의 길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예수님의 길은 우리에게는 평안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를 저주에서 건지시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안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평안의 말은 단지 인사 형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하나님 나라와 평안은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 냉소를 보내는 것이고, 교회 안의 사람들조차도 깊은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로지 현실에서 구체화 되어 나타나는 것에만 관심을 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체험과 함께 세상과 연결된 복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믿는 신자가 세상에서 그 같은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병 고침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병 고침은 하나님이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참된 인간으로의 회복을 의미하며 그것은 죄 아래 붙들린 자신의 실상을 고백하며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실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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