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7.19 11:24

(96강) 오병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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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4:13-21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41321.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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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 서 따라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 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설교>

 

◎ 생명과 생존의 문제 ◎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생존에 유리한 것은 무엇이고 불리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것도 이러한 계산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처음에 요한을 죽이고 싶으나 죽이지 못한 것은 백성들을 자극하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을 자극하는 것보다는 왕으로써 한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이 더 자신을 불리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요한을 내어 준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헤롯처럼 무엇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무엇이 불리한 것인가를 따지며 삽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존에 도움이 될까요? 십자가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불필요한 것입니까?

 

 

사실 성경에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들은 오직 생명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존에 매달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담고 있는 말씀들은 무가치하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배를 타고 떠나 빈들로 나아가십니다. 무리가 그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빈들에서 우리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이처럼 마태는 세례 요한의 죽음과 빈들에서의 오병이어 기적을 연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의 죽음과 오병이어의 사건이 무관하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라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한 요한이 죽었다는 것은 구약이 마감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약의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새로운 시대가 무엇인가를 오병이어 사건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마태의 의도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병이어 이야기를 배고픈 인간을 불쌍히 여겨서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즉 배고픔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생존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대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이러한 예수이지만 그것은 생존이라는 욕구의 시각으로 예수를 바라본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생존이 아닌 생명을 봐야 합니다. 생명을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본다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나를 살리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병이어의 기적도 생존이 아닌 생명과 연관된 이야기고, 신자에게 진심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세상은 육신의 문제인 생존에 매달려 살아가지만 신자는 생존보다 더 중요한 생명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생존의 문제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는 말씀처럼 생존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시는 것이지 우리가 책임지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원하는 생존을 구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생존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생존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오게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생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 오병이어의 의미 ◎

 

예수님이 빈들로 나가시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것을 보면 무리들 가운데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5절)라고 건의합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건의는 참으로 합리적인 해결방법입니다. 저녁이 되었으니 무리들이 배고플 것이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서 각자 해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슨 수로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형편을 몰라도 너무 모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자신들의 형편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씀에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으면서 그것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전부라고 말합니다. 겨우 그것으로 자신들이 뭘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면 겨우 한 사람이 먹을 분량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금씩 나눠 먹는다고 해도 몇 사람이나 먹을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서 각자 사먹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무리들을 보면서 저녁이 되었으니 배가 고플 것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배고픔이라는 현실적인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예수님께 제시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리들의 배고픔, 즉 생존 문제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보고 계십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명의 문제에 눈을 뜨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게 됩니다. 하지만 남자만 오천 명이라는 숫자 앞에 그것은 정말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남자만 오천 명이니 전부를 합하면 만 명 가까이도 가능한 숫자입니다. 그러한 무리들 앞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있으나마나한 양일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도 자신들에게 있는 것을 아무런 가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도 분명 제자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신 뒤에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약이 마감되고 예수님으로 인해 열린 새로운 시대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구약의 한 사건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불평했을 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 하늘에서 영혼을 살리는 참된 양식이 주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빈들로 나가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빈들에서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떼신 떡을 먹이신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는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참된 양식이 되시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써 영혼이 사는 시대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피와 살입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내어 놓으신 피와 살을 먹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에 속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이 되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은 가장 존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예수님의 피와 살이 주어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 피를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가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흠없는 거룩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고 존귀한 것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그 존귀함과 가치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들처럼 육신의 배고픔이라는 현실적인 문제, 생존의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예수님이 내어 놓으신 피와 살로 인한 생명의 가치성을 전혀 보지 못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은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천 명이 저녁이 되어 배고파하는 현실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제자들에게 하찮은 것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생존 문제에 매어 있다면 예수님의 피로 인한 생명은 그러한 취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 신자에게 있는 것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

 

예수님은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생존의 문제를 도와주시고 덤으로 생명까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부정하시고 생존보다 더 귀한 것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원할 뿐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떡의 문제가 충족되고 근심 걱정이 없어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말씀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생존이지 생명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 생명이 들어있지 않은 인간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죽음의 상태,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채 자기 생존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비참함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비참함에 대해 무덤덤합니다. 생존을 위해 수고하고 땀을 흘리면서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생존입니까 생명입니까? 생명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다고 해도 혹시 생존의 문제에 걱정 근심할 것이 없는 여유로운 자의 행보는 아닙니까? 진심으로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죽은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비밀, 생명의 말씀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이 간절함이 있는 신자에게 복음은 가장 존귀한 보물입니다. 복음을 아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것이고, 생존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복음이 힘이 되는 길을 갈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복음이 주어졌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인도받는 길을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하지만 항상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생존이라는 현실입니다. 우리 몸으로 부딪히는 것도 생존이라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존이라는 현실만을 바라봄으로써 신자 된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말씀의 위대함과 능력과 존귀함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생존의 문제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하찮은 것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제자들이 가진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찮게 보이는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크기가 수천 명의 무리를 먹이고도 남을 정도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였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그것으로 많은 무리를 먹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가 예수님을 외모로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나올 만한 가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현실을 기준해서 가치를 판단하는 인간의 악한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라본다면 여러분께 있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무가치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믿음도 말씀도 예수님의 피의 은혜도 용서도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처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취급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주어진 그것이 여러분을 살리는 능력이 됨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존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참된 현실의 문제에서 생각하신다면 여러분께 주어진 것은 여러분을 살리는 참된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고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하는 능력임을 안다면 말씀만으로도 얼마든지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에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전부로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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