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1.01 09:15

(111강) 이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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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9-13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7091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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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설교>

 

◎ 고난과 죽으심으로 이루어질 영광의 세계 ◎

 

예수님은 왜 하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을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물론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이처럼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머릿속에 굳게 각인되어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은 이상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우리보다 못해서일까요? 우리의 믿음이 제자들보다 더 좋아서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고난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곧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임을 인정하고 그 길에 기쁘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를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시고 그곳에서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의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여주십니다. 베드로가 목격한 것은 세상에서도 볼 수 없는 영광스러운 장면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짓고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영광의 세계를 계속 누리고 싶어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경험한 영광은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영광스럽게 변한 예수님의 모습 또한 세상에서의 실체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경험한 것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즉 하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곳에 있음으로써 하늘의 영광을 계속 누리고자 했지만 그 영광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하는 그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라한 모습으로 낮은 자리에 오셔서 고난과 죽으심의 길을 가는 예수님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은 세상이 알지 못한 영광의 세계의 문이 되었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 길로 오라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늘의 음성을 듣고 눈을 들고 보았을 때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예수님만이 영광의 세계에 들어가는 문이 되시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절)고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분명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천국을 본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영광된 장면을 다른 제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금하십니다. 왜 말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다른 제자가 ‘왜 우리는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까?’라고 항의하고 시기할 것이 염려되어서일까요? 물론 그 같은 사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자들과의 관계가 염려되어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은 성경의 깊은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한 얕은 시각일 뿐입니다.

 

 

이상한 것은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면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대꾸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0절)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입니다. 마치 일반인이 철학자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성경을 토대로 해서 그 대화의 세계에 발을 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말 4:5-6절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겠다는 예언의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보내시는 이유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돌이키지 않으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예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엘리야가 온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세상을 심판하는 날이고,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고 영광을 누리는 새로운 세계가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산에서 엘리야를 목격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엘리야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엘리야가 왔기에 그들이 기다리고 소망했던 새로운 영광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왔고 이제 선지자가 예언한 영광의 그 날이 우리에게 이르렀다는 것을 산 애래 제자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조금은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본 것은 영광의 세계입니다. 그 영광은 장차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의 고난도 죽으심도 부활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메시아가 왜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하는지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그들이 말하는 영광의 세계는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이 삭제된 참된 영광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부활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광이 무엇인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로 세상에 증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고 하십니다.

 

 

엘리야에 대한 문제를 끄집어 낸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다시 보내시겠다고 한 엘리야는 산에서 목격한 엘리야가 아니라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여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자가 가야 할 길이고, 인자가 가야할 길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 엘리야가 온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한 엘리야가 세례요한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엘리야로 세상에 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세례요한을 하나님이 예언하신 엘리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엘리야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대우하고 결국 죽음을 당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가실을 그대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임의로 대우합니다. 세상이 생각한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은 고의로 죽음을 유발하신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것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길이라는 공식을 세우시고 예수님은 그 공식대로 살기 위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도록 하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의로 오셔서 세상에 그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의를 불편해 했고 거부했습니다. 자신들이 기다린 메시아와 다른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늘의 의를 거부한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신 것이었습니다.

 

 

◎ 고난의 길 ◎

 

 

이제 생각할 것은 고난과 죽으심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하늘의 의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불편해 한 세상의 반응의 결과였다면 예수님을 믿는 신자 역시 고난을 회피한 채 믿음의 길을 갈수는 없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세상이 불편해 하는 예수님의 의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기피하고만 싶어 합니다. 고난은 곧 고통이고 고생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의 삶에 일치시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어쨌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때문에 신자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예수님의 고난을 자신의 삶에 일치시켜 사는 것은 믿음이 아니면 안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버지께로 마음을 돌이킬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고난을 회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인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예수님의 의를 증거하는 길을 가고자 한다면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의 의를 불편해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의 세계 안에서부터 불편해 합니다. 예수님의 의는 인간의 의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는 자기 행함을 통해 구축됩니다. 이처럼 자기 행함을 통해 자기의 의가 구축되고 그 의를 세상이 인정하고 높여주는 것은 큰 보람이고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부인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의입니다.

 

 

인간의 의를 적당히 인정해주고 칭찬하며 높여주는 것이 행함을 유발하는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성장으로 연결됩니다. 때문에 인간의 의를 부인하는 예수님의 의는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고난이 없는 길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다른 믿음일 뿐입니다.

 

 

신자는 자기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신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성취하실 미래의 참된 생명의 세계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의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성취하실 미래의 참된 생명의 세계입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사실 생명의 세계보다는 현재 세상 속에서 자기를 성취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좀 더 높은 곳으로 끝없이 오르고 싶어 하고 오르기 위해서 싸우며 삽니다. 이런 우리에게 고난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다가오기 십상입니다.

 

 

신자가 생명의 세계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과 고난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고난이 없으면 천국을 소망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는 것일까요? 물론 고난이 구원의 조건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난을 기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과연 종말론적 신앙인지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산에서 목격한 영광의 세계를 예수님의 부활 전까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그 뜻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의 영광의 세계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해 열려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목회도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로 평가되는 세상에서 참된 성공과 실패는 오직 종말론적으로 평가될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세계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것만이 참된 성공과 실패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영원한 하늘의 생명을 기준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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