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1.30 17:08

(123강) 부자의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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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16-2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9162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설교>

◎ 세상의 천국기준 ◎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생각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에 의해서만 천국 백성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생명의 나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천국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인 것입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누군가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생각에 ‘저 사람은 100% 천국 갈 사람이다’라고 칭송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에 맞지 않으면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천국 기준에는 ‘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한 행위, 즉 착한 일을 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 기준은 기독교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갖고 있는 일반적 기준이며 구원에 대한 상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동조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착하게 살지 못하면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고 절을 다닌다고 해도 착하게 살면 천국 가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윤리와 도덕이 토대로 된 사고방식에 부합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 간다’라는 말에 대해 ‘기독교의 독선’이라고 하면서 반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당연히 믿는 모습이 있어야 하고, 예수를 믿는 모습은 선한 행실인데 선하게 살지도 못하면서 예수 믿는다며 천국 간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선’이 구원과 복의 기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준이 교회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착하게 사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신자다움인 것처럼 오해되어 있으며, 교회에서 강조하는 신자의 성화 또한 도덕과 윤리적 시각에서의 행위 변화와 맞물려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선’이 천국에 해당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를 본문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 율법을 지킨 청년 ◎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라는 질문을 합니다. 영생에 대한 질문을 했다는 것은 구원에 대해 관심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청년이면서 부자였다면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일에 더 관심을 두었을 법도 한데 영생, 즉 구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한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는 영생에 대한 오해와 함께 인간적 사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선한 일을 실천함으로 얻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천국은 인간이 행한 선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천국의 원칙과 전혀 반대된 인간의 기준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기준으로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에는 선한 일을 행하는 문제에 대한 자신감이 담겨 있습니다. 선한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라는 질문은 쉽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청년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는 말씀에 대해 “어느 계명이오니이까”라고 응답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한 여섯 가지의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모든 계명을 지키며 살아왔기에 그러한 자신을 영생을 얻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율법 실천을 경건한 신앙으로 여겼던 유대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계명을 잘 지킨 청년은 부족함이 없는 경건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한국교회의 시각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적 시각에서 주일 성수와 십일조 등 실천적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가 원하는 신앙이 바로 부자 청년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는 계명에 대해서도 지켰다고 한 것을 보면 이웃을 도우며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이면서 계명을 지키는 신앙생활에 철저했고 이웃을 돕는 선한 일에도 부지런했다면 교회가 원하는 완벽한 신앙인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현대 교회에서 부자는 곧 ‘복 받은 사람’으로 여김 받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도 부자는 복 받은 사람이며 가난한 사람은 저주 또는 징벌을 받은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따라서 부자 청년은 유대 사회에서는 복 받은 사람이며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킴으로써 신앙적인 면에서도 경건한, 말 그대로 완벽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청년의 근심 ◎

 

 

이 청년은 자신을 둘러싸고 완벽한 조건 안에서 보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곧 자신의 부족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청년의 부족함을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절)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을 지키고 실천함으로써 온전해지고자 한다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함을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여 온전함을 이룰 사람은 없습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도 결국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예수님에게서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이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소유한 재산을 모두 포기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재산을 장학 재단이나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끔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나름대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에 기부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는 식으로 기부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소중한 자기 재산이 아무 보람도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청년이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여러분이라고 해도 청년과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자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고 돌아간 반면, 우리는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도 근심은커녕 담담할 뿐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말씀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여러분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까? 이 점은 여러분 스스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청년이 예수님에게서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절)는 말씀만 생각한다면 재물에 대한 욕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며 이 욕심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선은 진정한 선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의 선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는 말씀에서 선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계십니다. 따라서 청년은 재물로 인해 근심하고 떠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과, 인간과, 영생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 영생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

 

 

청년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한 일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영생은 무슨 선한 일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기존의 자신이 살아가던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청년이 살아가던 세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재물이 많은 것이 곧 복이 되는 세계고, 영생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으로 알고 있던 세계입니다. 청년은 자신이 살아가던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청년은 기존의 자기 세계에다가 영생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재물이 많고,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지켜옴으로써 신앙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는 자기 세계에 확고한 영생을 추가함으로써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인생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와 다를까요? 현대 교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청년처럼 돈과 경건한 신앙과 천국으로 채워진 완벽한 자기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말씀은 자기 세계를 포기하라는 뜻이기 때문에 근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더 많은 재물을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참된 보화로 여겨지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에 대한 청년의 생각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긴 것이 잘못된 것이고, 율법을 지키며 살았던 자신을 선한 존재로 여긴 것이 잘못된 것이고, 인간은 무엇으로도 온전해 질 수 없는 존재임을 알지 못한 것이 잘못된 것이고, 무엇보다도 영생이란 자기 세계를 벗어나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몰랐던 것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떠나가게 한 치명적인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단지 교회 다님으로써 천국만 가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것이 청년처럼 기존의 자기 세계에 천국을 하나 추가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국에 해당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청년은 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그러면 재물이 적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재물이 많든 적든 사람에게 재물은 자신의 삶의 안전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힘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기존의 세계이며 이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날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때문에 ‘무엇을 하여야’라는 말은 자기 현실을 깨닫지 못한 무지한 자의 질문일 뿐입니다. 영생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린 문제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신자에게 예수님은 하늘의 보화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재물로 인해 기뻐하기보다는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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