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2.06 17:51

(124강) 천국과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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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23-2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9232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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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설교>

 

◉ 예수님이 유대 사회에 오신 의미는 ◉

 

 

유대인은 하나님에 대해서만큼은 최고의 전문가라고 자부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대해 전문가이며 그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도 전문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일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유대 사회에 오셨습니다. 왜 유대사회에 오셨을까요? 하나님을 잘 믿는 유대인에게보다는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 나라에 오셨어야 하지 않을까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유대 사회에 오셨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 즉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모든 것이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으로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실 필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 오셨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모두 잘못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들의 신앙으로는 천국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했고 그 분노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천국 기준은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 기준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천국기준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 기준을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천국기준은 명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현대 교회의 신앙에서 유대교적인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현대 교회의 신앙이 유대교적인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면 그 신앙은 천국으로부터 거부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사회에 오셨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천국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모인다면 그것은 단지 종교인이 모임일 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 청년의 자기 성취를 위한 영생 ◉

 

 

여러분은 왜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까? 지난주에 우리는 영생의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온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영생의 문제로 모이신 것이 맞습니까? 하늘의 생명의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해서 모이셨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이 있어야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청년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고 돌아갑니다. 재물이 많은 것이 이유였습니다. 청년은 영생의 문제를 인생의 전부로 여긴 것이 아니라 단지 성공적이고 완벽한 인생을 위해 필요한 한 부분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때문에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재물도 복된 인생을 위해 없으면 안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영생이 우리 인생의 전부를 차지할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지 않으면 우린 항상 중요하게 여기는 또 다른 뭔가를 포기하지 못하고 예수님에게서 발길을 돌릴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앞에 선 청년과 다르지 않은 우리의 실제 모습입니다.

 

 

청년의 이야기는 예수님에게서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씀을 실천할 수 없는 자기 한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청년은 끝까지 영생을 자신의 힘으로 성취해야 하는 문제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을 실천하는 그 의가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천국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 제자들이 생각한 부자의 의미는 ◉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천국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답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절)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가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3,24절)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절)라고 반응합니다.

 

 

제자들의 말은 ‘부자가 천국 못 간다면 어떤 사람이 갈 수 있느냐’는 의미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매우 놀랐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천국 못 간다는 말이 왜 충격적이었을까요?

 

 

당시 제자들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또 유대사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자신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부자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조금 납득하지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부자가 천국 못 간다는 말에 놀라기는 합니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자신을 부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 자신을 부자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이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부자로 여기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예수님의 말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부자가 아니었으면서도 매우 놀라면서 ‘누가 천국갈 수 있습니까?’라는 반응을 보인 것은 ‘부자’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자를 단지 돈이 많은 사람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 부자, 즉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반대로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 유대 사회의 사상입니다. 부자였던 욥이 모든 재산과 자식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되자 그것을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긴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난은 단지 돈이 없다는 불편함과 함께 힘없는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유대 사회에서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았다는 부끄러움과 함께 멸시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인인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 못 간다는 말은 단지 재물이 많은 사람이 천국 못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에 매우 놀랐던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 한다면 그 외의 사람은 더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의미로 ‘누가 천국 갈 수 있습니까’라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천국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모두 해체해 버리는 말씀이기에 충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에게도 그 같은 충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설마 영생이 하나님의 복의 상징인 부를 포기하고 오히려 저주와 멸시의 상징인 가난의 길로 들어가는 것임을 상상하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은 낙타와 같은 존재 ◉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놀라움과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에게 있는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하기 위함이고 그것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말씀인 것입니다.

 

 

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까? 그것은 사람은 마치 낙타와 같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낙타를 거론한 것은 아마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동물이 낙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천국문은 바늘귀처럼 좁습니다. 바늘귀는 막혀있지 않고 실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은 있습니다. 하지만 낙타는 자신의 몸집을 실처럼 작게 줄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사람이기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청년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유대인에게 부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청년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영생까지 확보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확대, 자기 충족이라는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을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낙타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자기 확대와 자기 충족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청년은 낙타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진 존재로 천국 앞에 서서 그 몸집을 가지고 자기 힘으로 천국을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라는 질문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어떤 선한 일, 어떤 율법의 실천으로도 낙타와 같은 거대한 인간의 욕망을 줄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것이 곧 욕망을 줄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어떤 인간도 스스로 자신을 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로 낙타로 천국 앞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심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미 낙타라는 거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에 그런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내 자신을 바늘귀와 같은 천국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작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천국에 대한 가능성은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말씀에만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아들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기준은 아들을 믿는 것이고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는 자기 인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써 자기 백성을 아들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아들 안에서는 우리의 선에 대한 열심도 실천도 자랑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낙타와 같은 내가 바늘귀를 통과했다는 것으로 놀라워하며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감사하고 기뻐할 뿐입니다.

 

 

물론 낙타와 같은 존재 그대로 바늘귀를 통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늘귀를 통과할 존재로 만드십니다. 그것이 곧 부자로 살든 가난한 자로 살든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은혜 안에 있는 것이고 그것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되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신다는 이 말은 낙타처럼 크게 부풀어 있는 우리의 욕망을 터뜨려 해체해 버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욕망이 터뜨려지는 경험이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있는 죄의 세력은 또 다시 그 욕망을 봉합합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자신을 충족하고자 하는 낙타로 살아가게 합니다.

 

 

신자는 이러한 자기 실존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실감하며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기준이며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말씀과도 일치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부모가 주신 것을 받아 누리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는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부모에게는 그것이 기쁨이 됩니다. 천국은 이처럼 ‘나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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