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3.13 23:32

(129강)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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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29-34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0293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설교>

 

◉ 관심의 문제 ◉

 

예수님의 죽으심은 세상의 시각으로 본다면 실패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현장에는 3년간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님을 떠나고 없었고, 제자들 외에 예수님을 추종했던 수많은 군중들도 모두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외면을 한 채 예수님 홀로 외로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현장이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만약 한국교회에서 목회를 했다면 그 목회는 실패했을 것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한 목회의 실패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된 결과를 뜻합니다. 사람이 떠나고 없는 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흔히 말하는 목회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분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오병이어라는 믿지 못할 기적까지 행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목회를 한다면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올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기적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 왔습니다. 그런데 왜 결과는 모두가 떠나 버린 실패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을 두고 계셨지만 기적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 모두가 떠나 버리고 아무도 없었던 이유입니다.

 

 

관심사가 서로 다르면 그 관계는 지속되기가 힘듭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에게 모여든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이 무리들을 예수님의 사람으로 붙들어 놓으려면 무리가 관심 두고 있는 것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즉 무리가 원하는 대로 능력을 베풀어서 그들을 만족시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당연히 무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큰 교회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기적으로 그들을 붙들어 곁에 붙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추종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관심을 가지고 오는 것을 책망하시면서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인 죽는 길을 향해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께 관심이 있습니까? 혹 예수님께 관심이 없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성경 말씀에서도 얻어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주일 예배라는 기독교 의식에 참여하고 돌아가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것은 구원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대해 제자들에게 세 번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하나님의 뜻인 죽는 길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주의 나라에서의 자리 차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고 다만 주의 나라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요직을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절)는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의 관심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놓는 섬김, 즉 죽음에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예수님의 그 같은 말씀에 관심을 두고 귀를 기울일까요? 사람은 자기 관심사가 아닌 문제에는 귀를 닫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귀를 닫았을 것입니다.

 

 

◉ 맹인들의 믿음 ◉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를 떠납니다. 그리고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과연 이들이 순수하게 예수님께 관심을 두고 따른 것일까요? 큰 무리들이 비록 몸은 예수님에게 나아와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마음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데 있음을 마태는 두 맹인을 내세워서 말하고자 합니다.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지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가 맹인들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해도 개의치 않고 더 크게 소리 지릅니다. 무리는 맹인들의 외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들이 위대한 존재로 여기며 따르고 있는 예수님을 감히 천하고 저주받은 존재인 맹인들이 소리 지르며 부른다는 것이 못마땅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맹인들이 뭐라고 소리 지르는가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맹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단지 기적을 행하여 병을 고쳐주는 능력을 가진 예수로만 알지 않았습니다. 만약 능력을 가진 예수로만 알았다면 그들은 아마 ‘예수여 우리 눈 좀 고쳐주십시오’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보다는 다만 그 능력으로 눈만 뜨면 되기 때문입니다.

 

 

맹인들의 외침은 단순히 눈만 뜨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사람의 외침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맹인들은 자신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볼 때 맹인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들의 처지는 눈이 정상인 사람들이 볼 때는 불쌍합니다.

 

 

하지만 과연 맹인의 처지에 있는 사람도 자신을 불쌍하게 여길까요? 그래서 타인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까요? 맹인, 즉 장애인이라고 해서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체가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 받고 동정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맹인이 앞을 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다면 그것은 단지 동정을 구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맹인들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먼저 호칭합니다. 그리고 뒤에 ‘다윗의 자손’으로 일컫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왕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라는 것은 단순한 임금이나 주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구원자이신 나의 왕’이라는 의미가 함축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맹인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 분인가를 알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눈을 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맹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일 뿐입니다. 그냥 불행한 사람이고 세상을 살아가기에 많이 힘든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사회에서 맹인은 단순한 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문둥병자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요 9:2절을 보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을 보면 맹인 된 것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즉 저주로 여기는 것이 유대인의 사고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 안에서 맹인들도 자신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야 말로 자신들을 저주에서 구출해주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왕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 믿음이 무리들이 잠잠하라고 야단을 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더 소리치게 만든 것입니다.

 

 

◉ 눈 뜬 자는 누구인가 ◉

 

 

예수님은 맹인들을 불러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눈 뜨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유대사회에서 맹인이 어떤 취급을 받는가를 생각한다면 눈 뜨기를 원하는 것은 단순히 세상을 볼 수 있기를 원한다는 의미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여김 받는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의미합니다. 누구도 저주 받은 자라고 정죄할 수 없는 해방을 뜻합니다. 맹인들은 바로 그 자유와 해방의 세계를 원한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의 처지를 불쌍히 여겼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말한 대로 동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저주 아래 있는 그들의 처지, 즉 죄인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날 때부터 저주에 속한 자로 태어납니다. 저주에 속한 자의 처지를 본다면 참으로 불쌍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쌍하다는 우리의 처지에 대해 무시하고 눈을 감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세상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맹인과 무리들의 차이점입니다.

 

 

제자들이 주의 나라에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다툰 것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맹인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불쌍함을 몰랐고, 때문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주 예수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윗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연결되고 일치 되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맹인을 무시하며 잠잠하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섬기기 위해 오셨고 죄에 갇힌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불쌍한 자로 여길 수 있는 사람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눈이 없는 사람의 관심은 예수님의 섬김과 불쌍히 여겨주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처럼 자리다툼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며, 무리들처럼 맹인과 같은 낮은 위치의 사람들은 무시하며 꾸짖고 잠잠하라고 소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보내신 것은 오직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하시는 긍휼과 자비만으로,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방식만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자라면 자기의 것을 내어 놓고 그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맹인들처럼 죄인이라는 자기 처지를 직시하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치며 은혜와 사랑을 구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다윗의 자손’으로 바라보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치는 맹인들은 이미 예수님이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제자들이나 무리들이 오히려 맹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자들과 무리들처럼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나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진심으로 예수님과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습니다. 과연 그가 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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