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2.07.22 13:40

(20강) 나병 환자와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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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5:12-16http://onlycross.net/videos/nuk/nuk-051216.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설교>

 

◉ 인간의 욕망을 편들지 않으신 하나님 ◉

 

 


사람이 소망하는 것 중의 하나는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건배 구호로 ‘구구팔팔이삼사’를 많이 한다는 우스개 이야기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99세까지 88(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4일 만에 죽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구팔팔이삼사’로 생을 마감하기 위한 비결이 ‘일십백천만’이론의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일) 하루에 한 가지 이상 좋은 일을 하고, (십) 하루에 열 번 이상 웃고, (백) 하루에 백 자 이상 글을 쓰고, (천) 하루에 천자 이상 글을 읽고, (만) 하루에 만보 이상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이 회자된다는 것이 건강에 대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마음은 저도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건강관리도 열심히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건강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믿음 없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내가 건강하든 병들든 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건강문제는 아예 관심두지 않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건강하게 사는 것도 병이 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 것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건강하게 살든 병이 들든 신자의 본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의 본분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이 본분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 깊은 생각이 없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건강하게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병들게 하시는 하나님보다는 건강하게 하시는 하나님만 생각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힘쓰면서도 ‘하나님은 나를 병들게도 하시는 분이다’를 믿는다면 병이 들었을 때 원망과 불평보다는 그동안 건강하게 산 것이 자신이 건강관리를 잘한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될 것이고, 이 은혜를 몰랐던 것에 대해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신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병들게 하심으로 신자의 신자 됨이 드러나고 증거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같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마음에는 ‘건강하고 편히 살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단순히 기대라기보다는 욕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욕망을 편들어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써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건강하게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병이 낫게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건강하게 하셔서 좋고, 병이 들었지만 낫게 하셔서 좋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생각의 중심을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늘 신자의 본분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예수님의 경고 ◉

 

오늘 본문에 나병 환자가 등장합니다. 나병은 목숨을 위협하는 병이라기보다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병입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로 비참한 병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병 환자들은 사람들이 꺼려하고 피합니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에 사람들에게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무서운 병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완전 격리되어 생활해야하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이 나병 환자가 예수께 엎드려서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요청 합니다. 아마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 자신을 낫게 하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한 동네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그 동네에까지 들어와서 예수님께 왔다는 것은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그 희망이 동네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까지 덮어 버렸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나병 환자의 열망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고 합니다.

 

 

나병을 고침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전혀 새로운 삶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은 뒤에 있게 될 새로운 삶을 고침 받은 나병 환자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침 받은 나병 환자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십니다. 경고하셨다고 한 것을 보면 아주 엄하게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의문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왜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고 하셨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왜 굳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제물을 드려 깨끗해진 것을 입증하라고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나병의 발병과 나음을 판단하는 판단자였습니다. 누군가가 피부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나병인지 아닌지를 제사장이 판단했고, 나병에 걸린 사람이 나았을 때에도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는지의 여부를 제사장이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병이 나은 사람은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정결의식을 치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기 14장에 등장하는 규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문자적 율법에 매인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면서 굳이 제사장에게는 가서 몸을 보이고 제물을 드려 깨끗하게 된 것을 입증하라고 지시하신 것이 의문인 것입니다.

 

 

4:41절에 보면 귀신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인 줄을 알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 지르자 예수님은 꾸짖으시면서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병자들에게서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소리친다면 사람들은 그 말로 인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는 있겠지만 다만 자신들의 병을 고치는 능력자로만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고침 받은 나병 환자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사람들이 단지 나병 환자가 나은 기적적인 현상에만 매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제사장에게 보이라 ◉

 

그런데 왜 제사장에게는 몸을 보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말한 대로 제사장은 유대인들에게는 나병을 판단하는 판단자입니다. 제사장이 보고 깨끗하다고 하면 그것은 공식적인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나병 환자가 나은 일이 얼마나 될까요? 당시 나병은 인간의 의술로도 치료가 불가능했습니다. 자연적인 치료 역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병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의 권위에 반항하던 미리암이 나병이 걸린 일이 있는데 그가 나은 것은 모세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이 나은 것도 엘리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나병이 나았다는 것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저주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증거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고침 받은 나병 환자를 제사장들에게 증거물로 보내셔서 나병을 고치신 예수님이 참된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해방시키시고 자유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기하게 보이는 능력을 행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귀신들의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따라서 단지 신기한 능력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면서 쫓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보다는 시각적인 현상만을 보면서 예수를 좇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자로써 예수님을 좇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런 자와는 관계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피하시는 것입니다.

 

 

15절에서도 보면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짐으로 인해서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 받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몰려드는 이들이 귀찮거나 상대하기 피곤해서 피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일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고치신 실제적인 일은 없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가시적인 현상에 매달려 있고 경험적인 것을 앞세워 예수를 말하거나 좇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은혜의 증거물 ◉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오셨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차원에서 나병 환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께 엎드려 하는 말부터가 의미가 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는 말은 환자가 통상적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대개는 ‘예수님 내 병을 고쳐주세요’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환자는 자신이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며 깨끗케 되는 것은 주의 뜻에 달렸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가 나은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결과라는 얘기가 되며, 단지 한 개인의 병을 고쳐주신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두를 깨끗케 하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보여주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 환자가 제사장을 찾아갈 때는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증거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까? 나음을 받았고 깨끗하게 되었습니까? 누구나 쉽게 ‘예’라는 답을 할 수는 있지만 어쩌면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 지르는 그 수준에서의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말은 하지만 은혜를 입은 증거물로 존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증거는 자신에게는 자랑하고 내세울만한 선하고 의로운 것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서 은혜 받은 자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것에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위에서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 상관없이 예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이 건강하든 병들었든 우리는 더러운 나병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에 대해 화낼 이유도 없습니다. 아무리 잘 된 것처럼 보이고 형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결국은 모두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돈을 가지는 것이 힘이고 제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사고방식에 묻혀서 함께 멸망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더러운 우리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가장 귀함을 아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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