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7.20 10:07

(22강) 선한 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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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8-10http://onlycross.net/videos/eph/eph-020810(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때문에 기독교가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실천이나 의는 구원의 문제에 개입된 바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선과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선이 없다고 해도 믿음만으로 구원은 가능한 것입니다. 즉 믿음은 있는데 선행이 없을 때 그렇다 해도 구원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라면 이 고백에 이견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렇게 믿음만을 말하면서도 선행에 대한 문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선행을 실천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선행을 낳는 것일까요? 10절에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도 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선행은 당연한 것이고 믿음의 열매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물론 10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새로운 사람을 지으신 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선한 일은 신자가 자신의 삶에서 나타내어야 할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이 말한 선한 일과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한 일의 이해의 일치입니다. 만약 바울이 말한 선한 일의 의미와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한 일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면 결국 복음과는 다른 길에서 선한 일을 주장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선을 행해도 복음과는 상관없는 헛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말한 선과 세상이 이해하는 선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 5: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다르면 선일을 행하는 것은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는 능력이고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선한 일을 세상이 생각하고 우리가 이해하는 선행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선행을 요한이 말한 선한 일과 동일한 것으로 일치시킨다면 예수와 상관 없이 선행을 행한 모든 자가 구원을 받고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은 세상의 선행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히 13:21절을 보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본문 10절의 내용과 동일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선한 일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선한 일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바울은 선한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뜻을 세우시고 그 뜻을 우리에게 이루신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내용과 동일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점에서 창세기의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선한 일을 이루시며 그 일을 기뻐하신다는 의미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조의 상태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빌 1:6절에서도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역시 우리의 실천과는 무관한 착한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선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있으면 선행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선행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의 산물일 뿐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선한 일은 기존의 우리로서는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역시 선한 일은 세상의 선행과는 무관함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선행은 기존의 인간에게서 얼마든지 실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은 새롭게 지음 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새롭게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을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사용될 것인지 그 용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렇게 사용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자기 희망사항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건 어떤 사람이 되건 하나님의 소관인 것입니다.

 

 

10절 하반절을 보면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고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게 된 모든 일들이 내 뜻과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진 일인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겪게 된 일들 하나하나도 우리를 붙드시고 하나님이 뜻하신 길로 이끄시기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생각한다면 그동안 우리의 삶이 힘들었든 평안했든 하나님의 은총이었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고백이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시는 선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세계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자신에게 되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은혜고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러한 고백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자신의 능력과 힘과 열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만 자랑할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행하는 선한 일이고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고 또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왜 기존의 존재로는 안 되는 것일까요? 기존의 인간, 즉 옛 사람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힘과 선함과 도덕과 열심 모두를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 운운하면서 ‘할 수 있다’는 세상 풍조와 교훈을 따라 행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롭게 지음 받은 신자는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선함 또한 선을 가장한 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악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음을 알게 되기에 바울처럼 자신을 부인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고자 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속에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는 증인입니다. 인간의 무능력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되어졌음을 증거하는 증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알게 하신 것도 은혜를 증거하는 증인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선한 일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 열심이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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