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1.09 20:51

(120강) 천국과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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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1-9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9010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설교>

◉ 인간에게 한 몸의 관계는 불가능하다 ◉

 

결혼과 이혼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남녀가 겪는 인생의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결혼하지 않고 독신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모든 남녀는 결혼을 하기 마련이고, 결혼 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끝까지 백년해로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 이혼은 그렇게 큰 흠이 아니라는 시각이 형성되어 있지만 과거에 이혼은 여자에게는 큰 흠으로 남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여자는 참고 견딤으로써 부부라는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이혼은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진 부부라는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는 크게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결혼 실패라는 약점을 안게 되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부담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은 스스로 감내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자에게는 성경이라는 벽이 있습니다. 신자는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신자가 이혼을 하는 것이 과연 성경에 맞느냐?’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이혼문제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6절의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말씀이야 말로 ‘절대 이혼 불가’라는 원칙을 세우신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신자에게 있어서 이혼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9절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오직 음행한 연고로만 이혼이 가능할 뿐 어떤 이유로든 이혼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혼을 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이고, 서로 맞지 않고 불화가 잦은데도 꾹 참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일까요? 과연 예수님이 우리의 결혼과 이혼 문제에 관심을 두고 이혼을 방지하기 위해서 본문의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표면적으로는 결혼과 이혼에 대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이혼문제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내용입니다.

 

 

결혼의 법칙은 각기 다른 두 몸이 만나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한 몸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드러나는 현실은 각기 다른 두 몸으로 살 뿐입니다. 부부가 되어 한 이불을 덮고 사는 관계가 되기는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내 몸을 주장하면서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즉 한 몸이 아닌 각기 다른 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비록 부부라고 해도 이혼의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 시각입니다.

 

 

창 2:23절의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는 아담의 말은 죄짓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각기 다른 몸이 아니라 한 몸이었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죄를 지은 인간은 자기 몸의 가치를 위해 사는 인간이 되었고 그것이 곧 인간의 분리이며 죄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죄의 속성을 가진 인간이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었다고 해서 한 몸이라는 죄 짓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이 부부가 되어 사이좋게 지낸다고 해도 결국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 안고 있는 죄의 속성일 뿐입니다. 때문에 결혼과 이혼의 문제에서 신자가 배울 것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단순히 우리의 가정사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 결혼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완악함 ◉

 

바리새인들은 아내를 버리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혼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다, 그르다는 두 가지의 답만 예상했을 것입니다.

 

 

‘옳다’라고 하시면 아내를 버리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자신이 한 말을 뒤엎는 모순을 행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산상에서의 가르침에서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1,32)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르다’라고 하시면 신 24:1절부터 말하고 있는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거든 이혼증서를 써주고 버릴 수 있다’는 규례에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로 몰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신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린 자신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정당한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정당성 확보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인간의 완악함이고, 이런 완악함으로 인해서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없을 때만 가능합니다. 몸은 존재하되 ‘나’라는 자아의식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만 마음을 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인간은 선악과 사건 이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은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겠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가당치 않은 욕망일 뿐임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정당할 수 없는 존재고 오직 죄인이라는 본질만 남을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용해서 아내를 버리는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자기 행복, 자기 즐거움을 위해 율법을 이용하고자 하는 속셈만 있을 뿐입니다.

 

 

현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고 하는 수준이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지만 그 중심은 결국 자신의 유익과 즐거움을 구하는 것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실천했다는 것을 근거로 자기 신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완악함이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버리라고 한 것은, 이혼증서만 주면 아내 버리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 몸의 행복을 추구하는 완악함으로부터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기 위함이지 아내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결혼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결혼을 자기 행복과 즐거움을 위한 아내를 고르는 것으로만 여길 뿐, 결혼을 통해서 알아야 할 몸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 문제를 단지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라는 시각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결혼에 대해 후회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매일 그런 후회를 하고 살지는 않겠지만 서로에 대해 실망하거나 불화가 있을 때면 ‘저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좀 더 나은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는데’라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후회의 마음은 상대방이 자신의 행복에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처럼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로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을 통해서 오히려 인간의 완악함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도 자신의 정당성을 근거로 천국에 갈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신자의 이혼에 대한 내용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고 해도 서로가 자신의 행복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면 이혼합니다.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버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내를 버리는 것도 그 이유였습니다. 아내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세의 율법대로 이혼증서를 써주고 버렸던 것입니다.

 

◉ 새로운 몸의 관계 ◉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는 말씀은 인간의 육체와 육체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나눌 수 없는 새로운 몸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새로운 몸의 관계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오셨고, 신자는 예수님의 신부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신부인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신부다운 신부인가 하면 전혀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이혼당해도 할 말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에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고, 이 관계를 사람이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로 천국에 있게 된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으로써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를 예수님의 몸으로 여기시고 신부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참된 신랑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인 것입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만 서로의 몸을 내 몸으로 여기는 한 몸의 관계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각자 자신의 몸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부부의 사랑은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내 마음에 흡족하게 행동하는 그 때만 사랑의 느낌이 있을 뿐, 자기 행복을 훼방하는 장애물로 여겨지는 순간은 내 인생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대상으로 볼 뿐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부부관계에서 자신의 완악함과 함께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허술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신부로 삼아주시고 예수님과 한 몸이 되게 하셔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인해서만 가능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여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완악함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우리는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정당하지만 정당성을 주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아예 정당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자입니다.

 

 

9절의 말씀에 다르면 우리는 버림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신랑이 아닌 항상 다른 것을 두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한 몸의 관계로 붙들고 계시는 은혜로 인해 천국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 앞에서 신부 자격도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믿고 사는 그가 바로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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