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5.01 13:58

(135강) 악한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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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33-4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13346.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3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설교>

 

◉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 ◉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죄입니다. 만약 누구든 십자가 앞에서 의를 드러내고 자랑한다면 그가 말하는 십자가는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가 아니라 의를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이 가상적으로 고안해 낸 거짓 십자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 결과인데 그 같은 피의 현장에서 자신의 의를 바라본다는 것은 십자가를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피 흘림의 현장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죄를 시인하는 죄인의 구세주로 오신 것이지 의로운 자들을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한 구세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기 의에 매어 있다면 그는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고 그것은 곧 천국과도 상관이 없고 저주에 속한 존재일 뿐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만 잘 믿으면 천국 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예수 잘 믿으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예수 잘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못 믿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인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의 의는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의라고 여겼던 모든 행동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피 앞에서 쓰레기와 같은 것임이 가차 없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앞에 나오게 되고 말씀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도 주님의 공로이며 은혜일 뿐,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히 4:12-13절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는 말씀처럼 말씀은 우리 속에 숨겨져 있던 더러운 죄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이러한 믿음의 현장에서 자기 의가 나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기 의를 도구 삼아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믿음에 있지 않고, 예수 밖에 있는 자일뿐이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우리입니다.

 

 

◉ 포도원을 세로 받은 농부 ◉

 

 

이 같은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산울타리는 야생동물이나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가시나무와 같은 식물로 두른 울타리를 말합니다. 이처럼 주인은 포도원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어 놓고 농부들에게 세로 준 것입니다.

 

 

열매를 거둘 때가 되어서 주인은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농부들인 주인의 종을 잡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칩니다. 주인에게 바쳐야 할 열매까지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농부들은 아예 포도원을 차지하기 위해 주인이 보낸 아들까지도 죽여 버립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농부들이 포도원에서 일을 하지만 포도원은 주인의 소유이며 따라서 주인의 몫으로 돌아가야 할 열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의 것으로 돌아가야 할 몫을 자기들이 차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것을 받으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며 나중에는 아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농부가 바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처럼 당시 종교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45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주인의 몫으로 돌려드려야 할 열매는 무엇이고, 그들의 무엇이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가로챈 것에 해당되는 행동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농부들은 주인이 만들어 놓은 포도원을 세로 받았을 뿐입니다.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 농부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농부들은 다만 주인이 만든 포도원에서 일을 하며 주인 덕분에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 같은 주인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주인의 몫으로 정해진 열매를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기대한 것은 단지 수확한 열매가 아니라 주인에게 감사하는 농부들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포도원에서 수확된 모든 열매를 자기들의 것으로 삼고 싶었을 뿐입니다.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고 자기들 손에 주어진 열매가 주인이 아니었으면 있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인의 포도원 안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어디까지나 세로 받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뿐입니다. 포도원 안에서 농부의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이 같은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이 일해서 얻은 열매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포도원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잊은 채 땀 흘려 일한 자기의 수고와 노력을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주인이 보기에 악이 되는 것입니다.

 

 

◉ 율법의 세계와 은혜의 세계 ◉

 

 

사람은 자기 수고와 노력의 대가로 뭔가 소유하게 되는 것이 있기를 원합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하면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가치가 상실되는 것 같아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수고와 노력의 대가로 소유하고 싶었던 것은 자기 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은 율법의 세계에 있었습니다. 은혜의 세계는 주인이 모든 것을 완벽히 만들어 둔 포도원을 세로 받아 들어가는 것이지만, 율법의 세계는 자신이 직접 포도원을 하나하나 만들어 갑니다. 포도나무를 심고 산울타리를 치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만들어 세우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포도원은 자신의 것입니다. 따라서 포도원에서 생산되는 열매 또한 당연히 자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은혜의 세계에서 자기 소유는 없습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세로 주지 않았다면 포도원에서 일할 수도 없었음을 생각하기에 포도원에서 일하고 열매를 거두게 된 것 또한 주인의 은혜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인이 보낸 종을 환대하면서 기쁨과 감사로 열매를 내어 놓게 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칭송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천국도 당연히 율법에 대한 수고와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었고 따라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사람들은 천국은커녕 저주 받을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율법에 대한 그들의 수고와 노력은 모두 자신들을 위한 것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농부들은 포도원을 세로 준 주인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수고하고 땀 흘린 대가를 차지하는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도 정당한 대가가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가를 차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농부들에게 열매를 받으러 온 종들은 자기들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를 알아주지 않는 적이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악함이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차지할 수 있는 우리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세로 받아 살아가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고와 노력에 대한 대가를 기대합니다. 그것이 복으로 주어지든, 아니면 믿음 좋은 신자로 칭송되는 다른 사람과의 차별로 주어지든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복음은 그야말로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주지 않고 아예 묵살해 버리는 섭섭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거부하고 밀쳐 내느냐 아니면 결국 복음에 의해 장악되어 하나님이 세로 주신 세상 안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감사하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복음의 능력으로 장악하여 자기 수고와 노력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로 주께 나오게 하십니다. 따라서 감사함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자기 의는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로우심만이 있을 뿐입니다.

 

 

악한 농부들은 주인에게 돌아갈 열매까지 자기 것으로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일은 자신들이 했고 주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 자신들이 전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종들에게 열매는 당연히 주인의 것이기에 주인의 열매를 받기 위해 옵니다. 따라서 악한 농부와 종들의 만남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만남이 됩니다. 그리고 악한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고 죽임으로써 자기 생각대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세상의 반응입니다.

 

 

◉ 버림받은 예수님 ◉

 

 

예수님은 자기 것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자기 것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 자기 것을 위해 살지 않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서로 다른 두 생각이 존재하는 세상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자기 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쓸모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버려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42절)는 말씀으로 드러내십니다.

 

 

건축자들의 눈에는 쓸모없는 돌로 보여서 버려버린 돌이 실제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전의 머릿돌이 됩니다. 머릿돌을 쓸모없는 돌려 여길 만큼 건축자들에게는 머릿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건축자들은 건축에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런데도 진정한 머릿돌을 알아보지 못하고 버렸다는 것은 단지 자기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전문가였을 뿐, 하나님이 보내신 머릿돌도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었을 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대제사장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머릿돌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은 자신들이 행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들이 깨어져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깨뜨리기 위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쓸모없는 분으로 보여진 것이고, 십자가 또한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는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준 포도원에 살면서 하나님 덕분에 살아간다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그 수고와 노력 또한 하나님이 세 주신 세상 안에서의 수고이고 노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주께 돌아갈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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