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3.27 17:21

(131강) 성전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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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12-17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11217.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설교>

◉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한계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따르던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어떤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소리 높여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일컬으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고백하면서 ‘호산나’라고 높이는 것은 적어도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주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예수님에 대한 호칭들은 전혀 틀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소리치는 무리로 돌변하게 된 것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고백과 찬송은 자기중심적인 이해에 의한 인간의 지식이었을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맞았지만, 무리들은 자기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아로만 이해 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를 기다렸던 인간이 뜻이 서로 어긋났기에 무리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알았지만 무엇을 위해서, 무슨 일을 위해 오셨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항상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러한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인간이 끊임없이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신을 위한 자기의 길을 달려가는 죄입니다. 피조물다움은 팽개쳐 버리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자로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현대 교회를 통해서도 낱낱이 드러나고 있고, 우리 자신들에게서도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만을 바라보려는 어리석음에 가려서 그러한 현실을 보지 못한 채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 성전의 형편 ◉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비췬 성전은 한마디로 엉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성전이라면 경건한 분위기여야 마땅한데 매매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고 비둘기파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지금 우리의 예배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든 예배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장소가 아니어도 어디에든 예배당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오직 성전에서만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유대사회에는 회당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모여 사는 곳에 회당이라는 것을 지어 놓고 거기에서 안식일이면 모여서 구약의 말씀을 들으며 나름대로의 종교 행사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회당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는 드릴 수 없었습니다. 제사는 오직 성전에서만 행해지도록 하나님이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제사는 가장 중요한 종교행위입니다. 그들에게 제사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고 제물을 잡아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제사장이 들고 지성소로 나아감으로써 죄가 용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사가 오직 성전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차례 이상은 필히 성전에 와야만 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날이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이면 예루살렘 성전은 제사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으로 넘쳤습니다.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제물이 빠진 제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아닌 먼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제물을 가져오기가 곤란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물은 경제력에 따라 소, 양, 비둘기를 바치도록 되어 있는데 소나 양을 먼 곳에서부터 끌고 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끌고 온다고 해도 그 소나 양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제물로 쓰기에 좋은 상태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제물을 파는 장사꾼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성전에 매매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오면 성전세를 바쳐야 했는데 성전세는 성전에서 통용되는 유대인의 화폐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환전상입니다.

 

 

제물을 매매하고 환전을 하면서 많은 이득을 챙겼을거라는 것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없으면 안되는 것이 제물이기 때문에 폭리를 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환전하는 것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장사꾼과 환전상을 모두 쫓아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어찌 보면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장사꾼과 환전상이 없으면 제물을 구하기 어렵고 성전세도 바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사하러 온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 기도하는 집 ◉

 

 

그러면 예수님은 왜 성전에서 그 같은 일을 하셨을까요? 성전은 제사하는 곳이지 제물을 팔고 사는 장사를 할 수 없는 곳이고 돈을 바꾸어 주면서 이득을 취하는 곳이 아니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일까요?

 

 

먼저 성전에 장사꾼과 환전상이 있었다는 것은 성전을 책임지고 있는 제사장들의 묵인이 있지 않고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제사장들이 그들을 묵인했다는 것은 결국 뇌물이 오고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사장들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없이 성전에서의 매매를 허락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사장들이 뇌물을 받고 성전에서 매매할 수 있도록 묵인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것도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전이 존재하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성전에서 제물을 매매하고 돈을 환전하는 것들이 단지 장사하는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신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는 것과 연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적 의미는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장사꾼의 집’으로 만든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는 말이 제물을 매매하고 돈을 환전해주면서 폭리를 취하는 것을 두고 한 말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것과도 거리가 멉니다. 만약 폭리를 취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라면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적절한 이윤을 남기는 매매였다면 용납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씀은 사 56:7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말씀하신 것은 기도는 성전에 나와서만 할 수 있고, 성전에서는 기도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왕상 8장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 내용 중에 30절을 보면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 들으시고 사하여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기도의 의미는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성전을 향하여 한다는 것은 성전의 본질이 곧 죄의 용서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집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자 그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가신 성전에는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종교인의 의무를 다하려는 사람들, 그들에게 제물을 팔고 환전을 해서 이득을 챙기려는 사람들, 그것을 묵인해 주면서 자기 배를 불리려는 사람들로만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강도의 소굴로 보신 것입니다.

 

 

◉ 자신의 불쌍함을 보지 못한다면 ◉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 일들을 이상하게 여겼고 또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소리 지르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님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라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왕, 메시아를 의미하는 것인데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소리 지르기 때문에 예수님께 ‘너를 하나님이 보내신 왕, 메시아라고 소리치는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느냐’라고 분노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분노에 대해 예수님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고 답하십니다. 예수님이 곧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실 분으로 오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으로써 찬미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찬미를 온전케 하실 성전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미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여전히 분노로 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자신들이 지금껏 누려왔던 위치와 권세 , 그리고 이득들을 계속 누려 가는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불쌍함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무지한 채 오직 눈앞의 이득과 제사장, 서기관이라는 유대 사회에서 높임 받는 자신의 자리에만 연연함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로만 일관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불쌍함과 자신의 죄인 됨을 보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 집착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높아짐과 자신의 이득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에 분노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설령 예수님이고 성경 말씀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고, 참된 성전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인간의, 나 자신의 불쌍함을 깨닫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을 구하는 마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가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봉사하는 신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면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든 그 직분의 의미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신자로서의 참된 봉사는 예수님의 용서하신 은혜와 부활의 능력 안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봉사와 헌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의 불쌍함에 대해 보지를 못한다면 이러한 봉사와 헌신은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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