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6.12 17:14

(141강) 신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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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1-1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3011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설교>

 

◉ 책망은 성찰의 기회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의 책망이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을까요? 그러면 일반 백성들은 그들보다 믿음이 나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책망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책망이 일반 백성이 아닌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집중되어 언급되는 것은 인간의 죄의 모습이 그들을 통해서 가장 확실하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사람에게는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가 섬김을 받고, 낮은 자리에 있는 자는 섬겨야 하는 것이 사회적 구조이기 때문에 섬김을 받고 싶다 해도 사회적 요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섬김 받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은 누구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겠습니까? 당연히 섬김을 받고 있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교만을 책망하기 위해서는 섬김을 받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사람이라고 해도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교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사회적 여건으로 인해서 할 수 없이 타인을 섬기고는 있지만 섬김을 받고자 하는 속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에서 신자 된 우리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하는 것이 곧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길임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모세의 자리 ◉

 


2절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자리란 당시 유대인의 회당에 있던 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기관이 선생으로 이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 의자에 앉는다는 것부터가 일반 백성과는 다르다는 권위의식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이 모세의 자리는 현대 교회의 강대상을 연상케 합니다. 현대 교회의 강대상도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서는 자리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강대상은 아무나 설 수 없는 성역처럼 인식되어 있고, 그러한 인식으로 인해서 강대상은 교회 내에서 권위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많은 교회에서 강대상을 위 강대상과 아래 강대상으로 구분하면서 위 강대상은 오직 담임목사만 서도록 되어 있다고 하니 강대상의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신을 대단하게 여겼던 것을 책망하십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그것이 모세의 자리가 존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리에 앉은 누군가를 높이고, 어떤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을 그 자리에 앉게 하셨는가를 생각한다면,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로서의 역할과 의무에만 집중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현대 교회의 강대상의 의미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강대상, 즉 강단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마련한 자리일 뿐입니다. 강단 자체가 성역이 아니며 어떤 권위가 부여된 자리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강대상 앞에 설 때마다 자신의 할 일, 목사로서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서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의식이 희미해짐으로써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권위 의식만 살아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는 길임을 오늘 말씀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 말만 하고 행하지 않은 자들 ◉

 


모세의 자리에서 권위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권위에 대한 복종입니다.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 행했는가를 4절부터 자세히 언급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에 여러 가지 세부적인 조항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한 조항을 만들어 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겠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단지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위치에서 자신의 선생 됨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그러한 조항을 첨가시킨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친 그러한 조항을 지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는 것으로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경문은 경건한 서기관들이 율법에서 출 13:3-10, 13:11-16, 신 6:4-9, 11:13-21절의 네 구절을 양피지에 적어 보관한 상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이 경문을 이마나, 왼팔 안쪽 심장 가까운 곳에 끈으로 묶어 다녔습니다. 이것은 아마 네 구절의 의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마음에 두면서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살겠다는 굳은 결심의 의미로 시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점차 자신들의 경건을 보여주기 위한 과시용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굳은 마음은 사라지고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만 있었던 것입니다.

 

 

옷술은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았던 청색실로 짠 술을 말하는 데 이 역시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또한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고, 시장에서 문안 받고 랍비라고 칭함 받는 것을 좋아했다는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했고 또 그것을 즐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고 높여주는 것에서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행함이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서 그러한 행함은 나올 수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 말만하고 행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들이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 하고 타인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의도로 행동한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로 살았다면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춰 버립니다. 저 밑바닥으로 팽개침으로써 진심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임을 보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행할 때 드러나는 것은 겸손입니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행동하는 것도 없게 됩니다. 따라서 말씀을 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낮아짐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 증거는 교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 다 형제니라 ◉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8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누구도 말씀을 전한다는 것을 빙자해서 랍비, 즉 스승의 자리에 앉을 수 없으며 아비나 지도자로 칭함 받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말씀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스승의 자리에 앉고자 하고, 아비나 지도자로 칭함을 받고자 한다면 그는 말씀을 행하는 자는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다 형제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신자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가능해지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말씀으로 인해 낮아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낮은 자리에 있게 되면 자연히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한 관계가 됩니다. 낮은 자리에서 또 다시 높고 낮음의 구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목사와 신자를 구별하여 대하는 것은 말씀의 세계가 아닙니다. 권위는 말씀에 있는 것이지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을 뿐입니다.

 

 

목사 자신도 말씀에 의해 다스려져야 하고, 따라서 목사도 말씀으로 말미암아 낮은 자리에 내려가야 합니다. 낮은 자리에 모든 신자가 함께 한다면 신자의 관계는 모두가 동일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선생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역시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가르치는 스승으로 일컬음 받을 수 없는 것이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고 해서 신자의 영적 아버지라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목사를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지도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살아계심과 활동을 무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할 것으로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 등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말씀의 정신도 본질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를 주일 잘 지키고 십일조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지키는 신자의 행함은 낮아짐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가 형제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 말씀의 참된 행함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책망을 통해서 앞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살아가야 할 제자들이 지향할 바가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란 직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도의 사역, 즉 사도로서 할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라는 것 때문에 특별히 높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높이고 순종해야 할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은혜가 신자를 형제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큰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완벽하게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섬김의 은혜로 사망에서 건짐 받았음을 안다면 자신을 높이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를 믿는 것이고,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의 은혜가 우리를 낮아지게 하고, 낮은 자리에서 서로를 섬기는 섬김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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