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7.17 13:53

(146강) 나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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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29-3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32936.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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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설교>

 

◉ 자기 정당함을 추구하는 인간 ◉

 

 

자신의 정당함과 옳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타인을 동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자신의 우월함과 나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자기보다 나은 타인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앞세워서 ‘나는 저 사람 보다 낫다’라며 자기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들 하는 말이 ‘내가 너 같으면 그렇게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말로 예수님에게 심각한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한 말은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니까 삼가라’는 차원의 책망이 아니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말까지 하시면서 그들이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책망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30절)고 한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민 것은 자신들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하나님이 세워서 보내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안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종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선지자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그 시절에 살았었다면 조상들처럼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내가 너 같으면 그렇게 안한다’는 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에 담겨 있는 문제가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그토록 심한 책망을 하시는 것일까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말은 우리도 평상시에 쉽게 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본문의 예수님의 책망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음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나 같으면 그렇게 안했을 것인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두고서 ‘나 같으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마실 것 먹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내용에서는 ‘나 같으면 그런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으면서 겨우 마실 것 먹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짓은 안한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이 뒤에 칠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같은 상황에서 여전히 무리들을 먹일 것이 없는 것으로 걱정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으면 예수님이 무리들을 먹일 수 있을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자기 생각에 자신은 얼마든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 것으로 자기를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너는 했지만 나는 안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옳음과 정당성을 드러내면서 우월한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이고 오늘 우리들의 사고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자신을 판단하면서 어떻게든 우월한 나를 보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은 상대방의 약점과 약함을 짓밟는 방식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의 약점과 약함을 짓밟아야 자신의 잘함이 더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 같은 사고방식의 악함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파헤침을 받으면서 드러나야 하고 우리가 얼마나 악한 자의 길을 걸어왔던 가에 대해 생각하며 신자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선지자의 피를 흘린 인간의 속성 ◉

 

 

그러면 선지자와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자신을 믿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단 이러한 생각은 자신 스스로 옳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린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옳고 그른 행동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나 같으면’이라는 말로써 같은 상황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너는 옳지 않은 행동을 했지만 나는 옳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라는 것으로 자신이 더 옳고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죄 속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고, 동일한 죄 속에 있다는 것이 현재의 삶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보지 못한 자의 말일 뿐입니다. 이것을 간파할 수 있다면 ‘나 같으면’이라는 말은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31-32절)고 말씀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말은 자신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인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이면서 자신들 역시 선지자를 죽이는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죄의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왜 선지자를 피 흘려 핍박하고 죽였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었는데,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들이 이스라엘에게는 가시가 되고 못이 되어 찌르고 박혔습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한 이스라엘이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인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우리는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자신들의 죄와 악함을 드러내면서 가시가 되어 찌르고 못이 되어 박혀드는 말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분노하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 역시 조상들과 같은 길을 가고 같은 악을 행하면서도 ‘우리 같으면’라는 말로 자신들의 정당성과 옳음을 내세우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사의 새끼라는 책망을 들은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은 동일한 존재 ◉

 

 

우리는 누구에 대해서도 ‘나 같으면’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그리고 자신의 현재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누구 앞에서도, 또한 누구의 잘못됨 앞에서도 ‘나 같으면’라는 말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나 같으면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의 삶은 자신의 잘됨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하고,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만을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만 계시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여전히 내가 살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같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선악과를 수중에 넣고자 하는 탐욕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나 같으면 마실 것 먹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피로 살아난 놀라운 기적의 체험을 한 신자로써 남은 삶은 육신으로 인한 원망과 불평이 전혀 없이, 어떤 형편에서도 기쁨과 감사의 고백만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과연 그렇게 삽니까?

 

 

여러분 같으면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여기에 대한 답은 앞서 말한 대로 여러분 자신들이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말씀, 나의 죄와 불의함과 못남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말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부터 생각한 후에 내려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답은 우리 역시 이스라엘처럼 선지자를 죽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죽인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서기관 바리새인들도 여전히 같은 죄를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조상의 분량은 죄를 말합니다. 즉 너희는 지금 너희 조상들과 같은 죄를 채우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조상과 똑같은 죄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나는 다르다’고 하고 있으니 그것이야 말로 독사의 새끼에 해당되는 악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옥에 해당되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독사의 새끼는 어미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독사의 새끼가 ‘나는 독사가 아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독사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독사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독사로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과 이름과 영광과 명예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위해 ‘나 같으면’라는 말로써 방패를 삼는 것입니다. 결국 ‘독사의 새끼’라는 말씀은 선지자를 죽인 조상과 똑같은 자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의인의 피를 흘린 자 ◉

 

 

이제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나 같으면’ ‘나는 다르다’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자신의 악함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기에 회개가 없으며 악의 길을 가면서도 자신을 정당하고 옳은 자로만 여기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아갈 뿐입니다.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벨의 피와 사가랴의 피를 의인의 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라는 것은 처음과 마지막의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아벨이 자기 영광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가인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첫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 사가랴는 누구이기에 마지막에 흘린 의인의 피로 말할까요? 여기 등장하는 사가랴는 성전과 제단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고, 그러한 사람은 대하 24:21-22절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역대하에서는 사가랴가 아니라 스가랴로 말하고, 사가랴의 아버지 또한 바가랴가 아니라 여호야다로 말하지만 같은 인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가랴까지라고 말한 것 역시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이 역대하인 것을 생각한다면 결국 유대인들의 성경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의인이 등장했을 때마다 그들은 의인의 피를 흘리는 것으로 대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다르다’는 사고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대했던 것입니다.

 

 

선지자를 죽인 것이 잘못인 것을 알았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순종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으로 자기 의를 확인하고 나는 다르다는 우월감에 사로 잡혀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시 간혹 ‘나 같으면’라는 말을 하기 일쑤입니다. 누군가의 잘못됨에 대한 우리의 못된 반응입니다. ‘나 같으면 그렇게 안한다’는 것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잘못된 길을 가지 않고 옳은 길로만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그럴 수 있는 존재일까요? 우리가 죄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가를 몰라서일까요? 아닙니다. 알면서도 나를 포기하지 못하기에 나에 대한 탐욕으로 나를 위한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임을 안다면 ‘나 같으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 죄를 지적당하면 견디지를 못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벨의 피고 사가랴의 피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피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억울해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 ‘나는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억울해 할 수 있는가를 예수님의 말씀과 우리의 삶의 현실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의인의 피를 흘린 자로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돌아와야 할 의인의 피를 예수님이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음을 마음에 두고 예수님의 은혜로 심령이 채워져야 합니다. 이처럼 은혜로 채워진 심령에서 ‘나 같으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의 실수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것에 대해서도 ‘나 역시’라는 마음으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책망이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는 말씀이 되고 ‘나는 너와 다르다’는 구별이 아니라 모두가 동일하게 죄의 자리에 있음을 바라보면서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를 누리면서 그 은혜를 증거하는 길로 가기를 소원하시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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