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05.11 10:10

(108강) 사탄이 들어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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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1-6http://onlycross.net/videos/nuk/nuk-22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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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설교>

 

◉ 핍박자에서 사도된 배경 ◉

 

 

기독교는 경배의 대상이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지시하시고 명령하시는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경배의 대상이신 분이 지시하시고 명령하신 바를 따라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의 길로 가고자 하신다면 우리에게 지시하시고 명령하시는 분의 뜻이 무엇인가에 항상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성경을 통해서 그 뜻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내가 선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규정하고 신앙의 중심에 놓을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선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된 것을 붙들고 그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이루고자 하고 점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선한 것으로 구별하여 신앙으로 여기는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신 바가 없고,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선한 것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알아간다면 그 열매는 점차 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나의 선이 얼마나 하잘 것 없고 쓸모없는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복음을 위해 아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기 쉽습니다. 복음을 위해 많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복음을 위해 쓸모 있는 일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바울의 과거는 핍박자였습니다. 수많은 신자가 바울의 손에 죽었습니다. 심지어 스데반까지 죽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복음을 위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사울을 부르시고 주를 알게 하시고 복음을 위한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왜 이런 방식으로 불러 쓰시는 것일까요? 이왕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기로 하셨다면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악을 행하기 전에, 그리고 복음의 핍박자로 이름 떨치기 전에 좀 더 일찍 부르시면 안 되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핍박자로 활약하는 바울을 부르심으로 적어도 바울이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복음을 위한 길로 가지는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배후에서 핍박자인 그를 부르시고 복음에 대해 눈을 뜨게 하시고 마음을 열게 하시고 남은 인생 전부를 복음의 도구로 살게 하신 주권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바울로 인해 증거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면서 인간,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착각을 버려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위해 쓸 만한 자질과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착각을 버리고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는 자신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인 상한 심령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바울의 변화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의 인물이 다르지 않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유다는 나쁘고 다른 제자는 낫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이 있고 다른 제자들 역시 십자가 현장에서 도망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 이야기는 유다라는 한 개인의 악함을 드러내면서 ‘우리는 유다처럼 행하지 말자’라는 교훈적 내용으로 흘러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유다의 배후 ◉

 

 

3절에 보면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라고 말합니다.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감으로 행하게 된 것이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도를 의논하고 그들은 기뻐하며 돈을 주기로 약속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넘기는 일의 배후에 사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는 사탄의 의도에 따라 움직였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을 찾아가서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제안을 하고, 그들은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고 있던 차에 예수의 제자가 예수를 넘겨주겠다고 하니 기뻐하면서 그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상황만 보면 단순히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가 무슨 이유인지 스승인 예수를 배신하고 돈을 받고 팔아 버린 악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는 한마디로 상황은 유다 한 사람의 악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의 배후에서 그를 지배하고 움직이게 하는 존재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끼리 모여서 무슨 작당을 하고 악행을 저지른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사람들끼리 모여 벌리는 악행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지배하고 지시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유다의 움직임을 유다 한 사람의 개인적 움직임으로 바라보게 되면 반드시 ‘나는 유다와는 다르다’는 말이 나와지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변함없이 다른 제자와 동일하게 예수님의 제자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팔았다는 행동 때문에 유다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라는 위치에 그대로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팔지 않은 제자들은 배신자인 유다를 얼마든지 욕하고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는 문구는 이 같은 상황을 뒤바꿔 버립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아닌 다른 제자에게도 얼마든지 사탄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유다 본인은 물론이고 유다와 함께 하고 있는 다른 제자들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힘으로 막거나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의도하고 행한다면 인간은 그 의도대로 행동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군대라는 조직과 그 조직에 속해 있는 군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군대라는 조직에 속해있는 군인은 철저하게 상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등병이 일병이나 상병, 병장의 명령에는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명령이 자신에게 부당하다고 여겨지면 반발하며 거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모총장이 명령한다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습니다. 참모총장이라는 지위와 대장이라는 계급의 막강한 힘을 가진 자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현실이 그와 같습니다. 사탄이라는 막강한 존재가 지배하고 다스리고 그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현실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비록 악을 행하지 않고 사회적 윤리와 도덕을 따라 바르게 살고 있다고 해도 ‘나는 바르다’고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사탄이 내게 들어오게 되면 나 또한 사탄의 의도대로 행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군대 내에 있는 일반 병사들이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 명령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유다가 택한 현실 ◉

 

 

우리는 세상 현실을 이런 시각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그 뜻대로 이끌어 가심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사탄에게 장악되어 있고 사탄의 의도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말로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뜻과 자기 계획을 가지고 자기 힘으로 살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것이 작금의 기독교인의 신앙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현실로 인정하려는 것 때문에 사탄의 개입과 활동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개입과 활동에 대해서도 전적인 신뢰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유다가 허락을 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 넘겨줄 기회를 찾는 것입니다. 거래가 성사된 것입니다. 유다가 허락을 한 것은 자신의 수중이 돈이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와 함께 하는 것보다는 수중에 돈이 들어오는 현실을 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원하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기대한 현실은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이 아니라 자기 기대의 실현이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동일하게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영광의 회복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로 삼년을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그 같은 실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수중에 돈이 생기는 현실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현실을 기대하십니까? 예수님으로 완성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현실로 바라보며 그 현실이 실제로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여러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삶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견디고 인내하며 그 날을 기다리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생기는 현실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우리가 바로 유다처럼 예수를 넘기는 자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이 들어간 유다는 돈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것보다는 돈이 수중에 있는 것을 더 나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돈이 현실입니다. 누구든 돈 없는 인생이 자기 현실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돈이 되지 않는 예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또한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처럼 사탄의 세력 아래 있는 세상에서 우리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존재로 살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현실은 돈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며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뜻과 계획과 의지에 의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의 현실은 예수가 아니라 유대교였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를 흔드는 예수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궁리한 것도 그들의 현실은 오직 유대교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가 굳건해야 그들도 유대교 안에서 굳건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유대교를 위협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신자의 참된 현실 ◉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따라 삽니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사탄에 의해 지배받으며 사탄의 의도를 따라 사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예수님에 의해서 그 운명이 이미 확정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확정된 운명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세상과 돈이 아닌 예수님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자신의 참된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그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이고 제자들이며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운명은 예수님에 의해 확정되었고 그 확정으로 인해서 영원한 영광의 세계가 자기 운명에 실현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도 예수님의 확정에 의한 예수님의 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일이 주어지건 불평을 하지 않으며 예수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확정된 인생이기에 불안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신자가 누리는 평강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바라보는 현실과 십자가 신앙 안에서 바라보는 현실은 분명히 다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바라보는 현실은 자기 꿈의 실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일 뿐입니다. 환상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환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는 기독교입니다.

 

 

십자가 신앙 안에서 바라보는 현실은 사탄이 개입하여 흔들고 있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와 은혜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게도 사탄이 들어오면 사탄의 의도대로 사탄에게 장악되어 예수님을 파는 악한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붙드시고 사탄이 나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믿는 길로 가게 하신 것이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살아가는 현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신자의 현실이라는 것을 아는 신자는 현재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저울질 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확증했으며 크신 사랑에 의해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길에까지 오게 되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받고 예수를 넘기기로 작정한 유다를 보면서 ‘배신자’라고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예수보다는 돈을 선택하고 나의 유익을 위해 예수를 팔아 버리는 배신자의 길로 가고도 남을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믿음의 길에 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를 넘기기로 작정한 날은 유월절이라는 무교절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희생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현실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현실을 거부하고 가룟유다는 돈이 생기는 현실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현실은 십자가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이 현실을 걷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돈 되는 길로 가도록 시험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믿음의 현실은 돈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어떤 현실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운명이 예수님에 의해 확정되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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