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10.27 10:04

(83강)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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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4http://onlycross.net/videos/nuk/nuk-17010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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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설교>

 

◉ 인식해야 할 자기 문제 ◉

 

본문은 드러난 내용만 보면 용서의 덕목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용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귀한 가치를 지닌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다움을 보여주는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사소한 일에도 분노하고 참지를 못해 폭력과 심지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현실을 접하면서 서로에게 용서가 필요한 사회라는 것에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범하는 일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잘못을 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행한 잘못은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행한 잘못만 기억합니다. 나도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내가 입은 마음의 상처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오지만 서로 마음을 문을 닫고 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함께 모이는 곳에서는 필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무리 신앙인들의 모임이라고 해도 갈등과 다툼과 분열은 멈추지 않고 여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의 관계에 있다고 하면서 항상 나타나는 것은 서로 견제하고 실수하고 비난의 모습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를 이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여전히 죄 기운데서 살아가는 문제 있는 인간의 모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세상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문제는 교회에서도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도 하나같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도 문제없는 인간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드러난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누구를 탓하거나 판단하고 비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의 잘못됨에 눈을 뜨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나의 문제에 눈을 감고 있으면 항상 ‘당신은 왜 그런가?’라는 비난만 일삼게 되지만 나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되면 ‘내가 심판 받아야 할 존재구나’라는 고백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문제없는 교회됨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문제 있음을 인식하는, 즉 자신에 대해 눈이 열리는 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 누구나 실족하게 한다 ◉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서 자신을 실족하게 된 작은 자로 생각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은 자신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생각하기 보다는 타인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는 생각이 더 강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실수와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고 생각할 뿐, 자신이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고 상처를 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넘어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필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을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어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라고 하실 정도로 중대한 문제로 말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자 중 하나의 실족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자를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너는 없어도 되는 존재다’는 시각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없어도 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천국은 당연히 들어가지 못할 존재로 여겼고 오로지 저주를 받아 지옥에 들어갈 자로만 여겼기에 그들이 어떤 상처를 입든 관심두지 않고 경멸했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해서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외적 조건으로 본다면 부자는 복을 받은 사람이고 나사로는 저주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해당되는 것은 부자이지 나사로가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처럼 멸시와 고난과 천대 받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세상에서의 삶의 형편이나 모습과는 무관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높고 낮음의 차별이 없습니다. 목사, 장로, 평신도라는 직분의 구별이 없고 부자 가난한 자라는 차이도 없고, 행함에 따라 차별 대우를 하는 곳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높임 받았던 모든 조건들이 천국에서는 무시 됩니다. 오히려 그런 조건을 기준 삼아서 자신을 높이고 상대적으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지옥으로 이끄는 것임을 경고하신 것이 부자 이야기입니다.

 

◉ 천국과 작은 자 ◉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말씀한 작은 자는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잃은 드라크마 하나, 돌아온 탕자, 나사로로 비유하여 이야기를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자는 세상의 시각과 기준에서 볼 때 무시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작은 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작은 자를 무시하고 실족하게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타인을 세상과 동일한 기준과 시각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교회로 모였다고 하면서도 이 기준과 시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세리와 죄인을 대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바리새인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다르다’‘나는 아니다’는 이 생각이 이미 타인과 자신을 차별하고 있는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외적으로 드러나는 훌륭한 인격의 내면에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이 잠재하고 있는 것이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시각에는 죄인 한 사람이 소중합니까,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 소중합니까? 우리가 이미 들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로 더 기뻐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천국의 특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죄를 용서 받은 자만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모든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만이 높임 받습니다. 이런 점에서 죄인의 회개는 자신의 죄를 보면서 용서 받을 자로 주께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의 용서만을 높이게 되지만 의인 아흔아홉은 회개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 행위가 완벽했기에 용서가 아닌 자신의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여길 뿐입니다.

 

◉ 용서의 세계인 천국 ◉

 

이것이 천국이라는 것을 3,4절에서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의 특성은 용서 받은 자만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용서 받아야 할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즉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나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고 해주는 것이 나의 의무고 형제 사랑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형제가 죄를 범했다면 경고해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또한 경고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죄를 범하며 산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늘 형제로부터 경고를 받아야 하고 그 경로를 통해 회개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누군가가 죄를 경고하면 발끈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죄는 경고하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나는 너와 다르다’는 바리새인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가운데 늘 바리새인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의 죄에 대해 경고할 것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세계가 어떤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용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모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아는 사람이 모인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신앙의 세계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의 세계를 말씀을 실천하는 행함의 의를 쌓아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오해입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가 이런 오해 속에서 행함의 의를 쌓기를 선동하고 많은 사람이 행함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채 잘못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경고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은 용서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그들의 의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9장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일이나 행함의 경중을 따져 서로를 비교하고 더 큰 자로 여김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2장에 보면 또 다시 이 문제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부각되고 싶은 것이 뿌리 깊이 자리한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번 죄를 지었다고 해도 돌아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것은 용서를 실천하라는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신자는 용서 하는 자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인간이 하루에 일곱 번씩 용서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용서의 실천에 회의감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모든 죄를 용서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용서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인간에게 맞춰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일곱 번 죄를 지었다고 해도 회개한다면 그 모든 죄가 용서되는 것이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그만큼 회개는 예수님의 세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죄를 회개한 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자기의 죄를 알고 죄를 회개한 자로 예수님께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그 사람에게서 용서가 나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용서하는 것은 실천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를 앎으로 인한 열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용서 받은 사람만이 모인 곳임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여러분이 천국 백성이라면 그것은 자기의 죄를 알고 회개한 자로 예수님께 나왔음을 의미한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이처럼 우리는 용서의 세계에 들어와 있고 용서를 증거하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보다는 갈등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의, 자기 정당성만을 내세우는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형제의 잘못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은 왜 당신의 잘못을 말해주면 인정하지 않느냐?“는 질책만 일삼을 뿐입니다. 이것은 분명 용서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용서로 살고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가 용서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시각은 예수님의 세계와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회개해야 할 죄인으로 함께 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주님의 용서의 능력이 우리를 용서하는 관계로 세워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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