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11.03 09:47

(84강) 무익한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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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5-10http://onlycross.net/videos/nuk/nuk-17051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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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설교>

 

◉ 믿음을 더하소서 ◉

 

인간 관계에서 필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거나 누군가로 인해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새겨 두어야 할 것은 나 또한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비록 타인과 인간관계가 좋고 성격과 인격이 훌륭하다고 해도 나로 인해 누군가가 실족하는 일이 분명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자 맷돌이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 정도의 심각한 죄를 범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연자 맷돌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면 떠오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한 것이 죄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죄에 묶여서 어둠에 빠진 채 다시는 떠오를 수 없는 상태에 처한 것이 인간의 현실임을 먼저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새로운 나라가 용서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용서의 나라에는 용서 받은 자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보다 낫다’라고 비교하거나 평가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에 묶인 채 영원한 저주의 세계에 던져져야 할 처지였지만 예수님의 용서로 건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죄를 범했다면 그것은 곧 나의 모습이기에 누구에게도 죄를 심판할 자격 또한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3-4절의 용서에 대한 말씀은 용서라는 실천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새롭게 세워진 용서의 나라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나를 살게 하고 있음을 진심으로 깨달은 신자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용서가 그 증거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라는 요청을 합니다. 이것은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을 주십시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왜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일까요? 제자들의 요청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성공과 건강과 부요를 구하는 것보다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은 믿음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 믿음에 대한 오해 ◉

 

예수님은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믿음을 더해 달라는 제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필요로 하고 믿음을 요구한다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은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이것은 용서에 대한 가르침 후에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수준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를 실천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실천할 수 있다면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사람으로 존경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더 큰 믿음을 받아서 예수님이 말씀한 용서를 실천하여 예수님의 제자다운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자가 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실천할 수 있다면 존경과 칭찬을 받는 인물로 부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은 믿음을 용서를 실천하게 하는 능력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의도로 믿음을 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큰 믿음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큰 일과 작은 일로 구분하는 것부터 세상 기준에 붙들려 있는 잘못된 생각임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요 6:29)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이미 참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가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의 크기에 따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일도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에 따라 하는 일도 다르다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의 제자들도 그 사역에 따라 믿음의 크기가 차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 두 제자보다 사도 바울이 가장 큰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높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큰 믿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달라고 하는 것도 믿음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믿음을 오해했습니다. 이들 역시 큰 믿음, 좋은 믿음을 가시적인 것으로 차별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생각할 때 자신들이야 말로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른 실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의 믿음은 ‘나는 너와 다르다’는 차별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겨자씨 한 알의 믿음 ◉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울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을 능력으로 이해하는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지만 더 큰 믿음을 받아서 예수님이 말씀한 것을 실천하여 제자답게 되 보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은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는 능력을 행했어야 합니다. 그 일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능력으로 생각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땅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어라’는 나의 말에 순종하여 바다로 옮겨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의 일입니다. 그 같은 기적을 보일 수만 있다면 놀라운 능력을 가진 믿음의 사람으로 높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같은 놀라운 기적의 능력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을 능력으로 이해하게 되면 제자들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을 큰 일을 행하는 능력의 의미로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믿음의 능력이라고 하지만 믿음이 그러한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는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러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믿음을 제자들이 생각하는 능력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능력이라면 소위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는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용서는 분명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만 가능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분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는다고 해도 회개하고 나올 때 단 한 번도 외면치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죄 없는 자로 여김 받는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죄를 보게 하고 회개하게 하며 예수님의 용서를 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예수님의 용서 안에 있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큰 일을 행해서 나를 돋보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 주인과 종 ◉

 

예수님은 이것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말씀합니다. 종이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와 앉아서 먹으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주인이 먹을 것을 준비하게 하고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게 한 후에 먹고 마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인이 명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는 일은 없다고 말씀 합니다.

 

 

종이 밭에 나가서 종일 일을 했다고 해서 집에 돌아오면 주인에게 상을 받고 대접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주인을 위해 수종을 들고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인을 위한 모든 일을 마친 후에야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배고프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종일 주인을 위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당시 종은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종은 무슨 일을 했다고 해도 주인에게서 그 대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주인과 종의 관계를 들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야 할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무엇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여야 한 것을 했을 뿐이라는 이 종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이라는 것은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무슨 일을 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종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한 일로 인해 인정을 받고 높임 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고 높임을 받음으로 자기 한 일에 대한 보람을 느낍니다.

 

 

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수고를 기억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게 되면 큰 상을 받을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교회 일로 수고한 분이 있으면 그 수고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무익한 종이다’는 것을 앞세워서 누군가의 수고에 대해 무관심으로 반응하는 것은 수고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수고로 인해 살고 있음을 안다면 나를 위한 다른 사람의 수고에도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다만 내 스스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익한 종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무익한 존재 ◉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무익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고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간의 존재 가치가 향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 어떤 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의 자세를 잊지 않는 신자라면 그 어떤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세워 ‘나는 너와 다르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일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 것이고 항상 무익한 종의 자세로 하나님께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믿음을 빙자해서 자신의 능력과 업적을 나타내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붙들고 있고 존재케 함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무익한 종의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 바리새인들처럼 믿음에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것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살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잊지 않기 때문에 ‘무익한 종’의 자세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도 하나님의 능력이 하게 한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신을 믿음이 좋은 신자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고백조차도 말씀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을 했다고 해서 자신을 참된 신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 뽕나무가 바다에 심겨지는 것과는 비할 수 없는 능력과 기적의 세계를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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