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11.10 10:17

(85강) 돌아온 이방인

조회 수 4542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눅 17:11-19http://onlycross.net/videos/nuk/nuk-17111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설교>

 

◉ 문둥병자 열명 ◉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실 때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지역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남쪽은 유대 지역이었고 중간이 사마리아 지역이고 가장 북쪽이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때문에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남쪽 유다로 가려면 사마리아인의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둘러서 남쪽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인을 순수한 유대인 혈통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방인처럼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유대인의 습성을 무시하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 한 마을에 들어가시자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는 상황에 접하게 됩니다. 16절을 보면 문둥병자 중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처럼 한 명을 사마리아 사람으로 밝히고 18절에서 ‘이 이방인 외에는’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나머지 문둥병자 아홉은 유대인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들어간 마을은 유대인 문둥병자와 사마리아 문둥병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마을에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구별이 없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병자들이 사마리아 문둥병자와 함께 예수님께 외쳤다는 것에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게 되는 것은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의식으로 인한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을 차별한 것도 그러한 의식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한 의식에 의해 나보다 작은 자로 여겨지는 누군가를 차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문둥병자의 세계에서 그러한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웃음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 문둥병자가 사마리아 문둥병자를 향해서 ‘너는 나보다 더러운 자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 인이든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서 함께 하지 못하고 격리되어 생활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문둥병자의 세계에서는 누구든 저주 받은 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고 자연히 차별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의 마을에서는 유대인, 사마리아인이라는 차별이 없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해도 저주 받은 문둥병자고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문둥병에 걸렸다면 저주 받은 자일뿐이고 격리되어야 했기에 세상의 기준 또한 통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문둥병자에게 없는 것 ◉

 

그렇다면 서로 차별하는 것이 없으니 그들은 세리와 죄인을 차별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고 구원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신을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으로 여기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로 하늘이 기뻐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고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 받는 것이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또한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죄인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은 문둥병자의 마을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스스로를 저주 받은 자로 여기고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가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으로 여길 리가 만무합니다.

 

 

어쩌면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회개하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자신을 옳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높임 받는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들이야 말로 거지 나사로와 같은 고통 속에 살았고 작은 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것을 봐도 스스로를 예수님의 자비가 필요한 자로 여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구원 받은 자입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차별이 없으니 바리새인, 서기관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구원 받은 자는 사마리아 문둥병자 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잃은 양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은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며 사람에게 높임 받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지칭하는 것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혹 ‘나는 그들처럼 나를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사람을 차별하지도 않는다’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닙니까?

 

 

저는 그동안 설교를 하면서 매 설교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드렸고 자신의 악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죄인이다’라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증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차별에 대해 얘기할 때도 ‘나는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차별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또한 구원의 증표는 아닙니다.

 

 

만약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로 여기지 않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구원의 증표라면 구원은 결국 도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좀 더 수준 높은 도덕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 아홉은 어디 있느냐 ◉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문둥병자의 마을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스스로를 저주 받은 죄인으로 여깁니다. 자신을 불쌍한 자로 여기면서 예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그를 믿음이 있는 신자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도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착각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문둥병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합니다. 눅 5장에도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는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의 몸에 대시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므로 병이 나았고 그 후에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경우에는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도 않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씀도 없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만 하십니다. 또한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병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순종의 믿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5-19절까지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누가 봐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복을 받게 한다는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에게로 향했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것까지의 행동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깨끗함을 받은 후의 행동은 전혀 다릅니다. 열 명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절)라고 말씀합니다.

 

 

아홉은 어디 있을까요? 문둥병자라는 저주에서 벗어났으니 크게 기뻐하면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둥병자로 살았던 때를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고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하시고 그를 향해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드러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문둥병이 나은 것이 하나님의 기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수없이 체험했지만 결국 멸망을 초래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도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러면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면 구원 받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문둥병자 아홉이 병이 나았으면서도 구원 받지 못한 것이 단지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아홉 명의 문제는 감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돌아온 한 사람의 믿음은 감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시면서 나으면 돌아와 감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보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 행동에 잘못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은 것을 문제 삼으시면서 돌아온 것을 믿음으로 말씀하신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돌아와 감사했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이 돌아온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순종의 차원이 아니라 그 내면에 예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이 이방인 외에는 ◉

 

왜 유대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왔는지 그 이유를 알기는 매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생각해 보면 사마리아 사람은 굳이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데 돌아왔고 오히려 돌아와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유대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는 말씀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홉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병이 나은 것으로 예수님을 만난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병이 나은 것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은 문둥병이라는 고통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서 ‘병이 나으면 예수님께 감사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해서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의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나은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병을 낫게 하신 분에게 마음을 두게 된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둥병이 나은 은혜를 받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은혜를 베푸신 분에게로 마음이 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지칭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예수님도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여겼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사마리아 사람이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총은 자신들에게만 해당되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난 것은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기적은 유대인과 이방인 구분 없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열 명의 문둥병자가 모두 깨끗하게 된 것으로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자부하지만 은총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있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은총이 주어진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것에 있음을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총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베푸신 분에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은총을 주신 분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마음이 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물론 감사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원하는 것을 얻은 만족으로 인한 반응일 뿐이지 은총을 베푸신 분의 자비와 사랑에 마음이 매임으로 인한 감사는 아닙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도 실상은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참된 신자라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기 뜻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님에게 돌아오게 한 것은 자신을 깨끗케 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 마음이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그를 돌아오게 하고 감사하게 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우리의 믿음이라면 우리는 나의 구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구원될 수 없는 나를 깨끗하게 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붙들린 마음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14
2012.05.06 128 누가복음 (9강) 어린 예수님 신윤식 5556
2014.03.02 127 누가복음 (99강) 포도원 농부 비유 신윤식 4657
2014.02.23 126 누가복음 (98강) 권위 문제 신윤식 4742
2014.02.16 125 누가복음 (97강) 평화에 관한 일 신윤식 4733
2014.02.09 124 누가복음 (96강) 나귀 새끼와 예수님 신윤식 5802
2014.02.02 123 누가복음 (95강) 므나 비유 신윤식 4745
2014.01.26 122 누가복음 (94강) 삭개오 신윤식 4840
2014.01.19 121 누가복음 (93강) 보게 된 맹인 신윤식 4427
2014.01.12 120 누가복음 (92강) 감취어진 말씀 신윤식 4386
2014.01.05 119 누가복음 (91강) 부자와 하나님 나라 신윤식 4537
2013.12.29 118 누가복음 (90강)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신윤식 4574
2012.04.29 117 누가복음 (8강) 시므온의 찬송 신윤식 5875
2013.12.22 116 누가복음 (89강) 의로운 자 신윤식 4647
2013.12.15 115 누가복음 (88강) 인자가 올 때 신윤식 4930
2013.12.08 114 누가복음 (87강) 인자의 때에도 신윤식 4526
2013.11.24 113 누가복음 (86강) 하나님 나라 신윤식 5235
2013.11.10 » 누가복음 (85강) 돌아온 이방인 1 신윤식 4542
2013.11.03 111 누가복음 (84강) 무익한 종 신윤식 5069
2013.10.27 110 누가복음 (83강) 용서하라 신윤식 4495
2013.10.20 109 누가복음 (82강) 부자와 나사로 신윤식 495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Nex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