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12.15 10:06

(88강) 인자가 올 때

조회 수 493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눅 18:1-8http://onlycross.net/videos/nuk/nuk-18010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설교>

 


◉ 데려감과 버려둠 ◉

 

인자가 올 때가 반드시 있고 그 때가 이르면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며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자가 오실 때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전혀 다른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밤에 누워 있는 것은 동일하고 맷돌을 돌리고 있는 것도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 다름의 가치가 인자가 오셨을 때 데려감을 얻고 버려둠을 당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인자가 오셨을 때, 다시 말해서 세상의 마지막이 이르렀을 때 누가 구원을 받는가와 연결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인자가 오셨을 때에도 믿음 있는 자만 데려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데려감을 얻고 버려둠을 당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이 참된 믿음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본문의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 이야기를 통해서 가르쳐주십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엇이 믿음이냐?’의 문제는 외적인 행동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선입견은 믿음은 외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고 따라서 믿음의 여부도 외적인 행동을 통해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과 외적인 행동이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외적인 행동을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 없음도 분명합니다. 이것은 데려감을 얻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의 외적인 행동에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삶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인자의 올 때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 보자면 인자의 올 때를 믿고 기다리는 신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믿음과 삶이 동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참된 믿음이냐?’라고 물을 때 답은 분명합니다. 인자가 올 때를 기다리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이 있는 신자에게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

 

8절에 보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자가 오실 때 세상의 실상은 믿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자가 오실 때 세상의 실상이 그렇다면 인자가 오시기 전의 세상의 실상 역시 믿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세상을 그렇게 볼까요?

 

 

우리나라만 해도 수만의 교회가 있고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믿음의 부흥을 이루었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실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풍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믿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풍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믿음을 보겠느냐? 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본문의 비유는 믿음을 가르치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도에 초점을 두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본문의 비유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1절)라고 시작을 하고 있고, 내용 또한 한 과부가 자기의 원한을 풀기 위해 불의한 재판장이 괴로워 할 정도로 찾아가 번거롭게 함으로써 결국 재판장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다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1절과 8절을 연결하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것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기도가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믿음이라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열정은 지금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이 끈질긴 기도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그 같은 차이가 언급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기도에 더 깊은 관심을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제자들이 부딪힐 세상의 현실이 그들을 낙심하게 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17:37절에 보면 “주여 어디오니이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심판과 고난을 피해보고 싶어서 ‘어디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시체가 있는 곳에는 자연히 독수리가 모여드는 것처럼 죽은 자, 즉 버림을 당해야 할 사람들이 있는 것이라면 심판 역시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제자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핍박함으로써 예수님이 겪으신 것과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7:25절에서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 역시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로부터 버림을 받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현실이 제자들을 낙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자가 반드시 올 것이고 그 때에 그 원한을 풀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비유에 담긴 뜻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기도 응답이 없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한 인간의 고집이 담긴 행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기도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임을 생각해 본다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말씀은 현재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과부의 원한 ◉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은 원한 때문입니다. 원한을 풀고 싶은 간절함이 강하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라고 해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장이라면 그가 이방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로마에서 파견한 관리였을 수도 있습니다. 설사 재판장이 유대인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규례를 무시한 채 오로지 자기 이득을 좇아 뇌물을 받아가며 재판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과부는 사회적 약자에 속했기 때문에 가난했고 따라서 자신의 원한을 풀기 위해 재판장에게 뇌물을 줄 형편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조차 무시하는 재판장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과부에게 원한이 없었다면 재판장을 찾아갈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과부에게 있었던 원한이 과부로 하여금 재판장이 괴로워 할 정도로 자주 찾아가게 한 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부는 자신이 재판장에게 무시를 받는 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보다 원한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과 뜻이 있었고 그것이 재판장에게 무시를 받는 것까지 견디게 했던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재판장에게 무시 받는 과부의 형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부는 자주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기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장은 얼마 동안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장차 제자들이 겪어야 할 세상의 실상인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하나님이 마치 제자들을 무시하고 버려두신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고난과 핍박에서 건져주시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변화되어서 제자들을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현실이 바로 원한이 있는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웃들은 노아를 이해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자로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웃들에게 하나님은 아무런 징벌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조롱 속에서 방주를 만들었을 뿐이고 이웃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자신들의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 원한을 풀어주심 ◉

 

하나님은 노아의 원한을 어떻게 풀어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원한을 풀어주셨습니다. 세상이 조롱했던 방주가 생명이었음이 드러나는 심판을 통해서 풀어주신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자가 오실 때 드러나는 것이고 그 때가 곧 하나님이 신자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인자가 오실 그 때를 기다리며 현실에 낙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신자는 원한을 가진 과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은 복음을 알아주지도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지금의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것 때문에 나아진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을 세상이 알아줍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높임 받게 하시고 여러분이 소원하는 것을 이뤄주십니까?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었지만 세상일은 실패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조롱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이러한 원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원한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무시하시는 것처럼 힘든 현실에 방치해 두고 계십니다. 이것 때문에 신자가 낙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자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말씀이 성취된다는 믿음에 의한 기다림입니다. 노아가 심판을 막연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말씀은 성취된다는 믿음으로 기다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늘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결국 형식만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인자가 오시는 것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인자의 오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 주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영광을 얻게 하고 힘을 갖게 하는 방식으로 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자를 세상에 다시 보내시는 것으로 풀어 주십니다. 인자가 오시는 그 때가 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야 말로 생명이며 가장 지혜로운 일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그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따라서 현재의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인자의 오심을 바라보는 믿음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자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이 있는 신자의 기도와 믿음이 없는 사람의 기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이유는 세상의 현실이 노아나 롯의 때처럼 저마다 자기 인생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인생을 위해 살 뿐입니다. 인자의 올 때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 역시 자기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복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때문일 뿐입니다.

 

 

믿음은 인자의 오심을 기다리기보다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에 대해 절감하게 하며 기도하게 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세상을 보면서 기도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인자가 오신다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16
2012.05.06 128 누가복음 (9강) 어린 예수님 신윤식 5556
2014.03.02 127 누가복음 (99강) 포도원 농부 비유 신윤식 4657
2014.02.23 126 누가복음 (98강) 권위 문제 신윤식 4742
2014.02.16 125 누가복음 (97강) 평화에 관한 일 신윤식 4733
2014.02.09 124 누가복음 (96강) 나귀 새끼와 예수님 신윤식 5802
2014.02.02 123 누가복음 (95강) 므나 비유 신윤식 4745
2014.01.26 122 누가복음 (94강) 삭개오 신윤식 4840
2014.01.19 121 누가복음 (93강) 보게 된 맹인 신윤식 4427
2014.01.12 120 누가복음 (92강) 감취어진 말씀 신윤식 4386
2014.01.05 119 누가복음 (91강) 부자와 하나님 나라 신윤식 4537
2013.12.29 118 누가복음 (90강)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신윤식 4574
2012.04.29 117 누가복음 (8강) 시므온의 찬송 신윤식 5875
2013.12.22 116 누가복음 (89강) 의로운 자 신윤식 4647
2013.12.15 » 누가복음 (88강) 인자가 올 때 신윤식 4930
2013.12.08 114 누가복음 (87강) 인자의 때에도 신윤식 4526
2013.11.24 113 누가복음 (86강) 하나님 나라 신윤식 5235
2013.11.10 112 누가복음 (85강) 돌아온 이방인 1 신윤식 4542
2013.11.03 111 누가복음 (84강) 무익한 종 신윤식 5069
2013.10.27 110 누가복음 (83강) 용서하라 신윤식 4495
2013.10.20 109 누가복음 (82강) 부자와 나사로 신윤식 495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Nex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