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12.22 10:01

(89강) 의로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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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8:9-14http://onlycross.net/videos/nuk/nuk-18091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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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설교>

 


◉ 세리의 기도 ◉

본문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본문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 앞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나쁜 예로, 세리의 기도를 좋은 예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본문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의 선입견입니다.

 

 

이 선입견으로 인해서 본문의 비유를 바리새인처럼 기도하지 말고 세리처럼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경우를 교만으로 세리의 경우를 겸손으로 받아들이면서 세리처럼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본문의 비유를 그렇게 해석 하는 것은 예수님이 세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가 의롭다고 여김 받는 것을 그의 겸손한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바리새인의 기도를 비판하면서 세리의 기도를 신자가 취해야 할 모범적인 기도로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기도의 좋은 예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무시하지 말 것을 가르치기 위함도 아닙니다. 물론 본문의 마지막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는 내용이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겸손한 자는 높아진다는 교훈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해석은 결국 또 하나의 뻔한 교훈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쁘고 세리의 기도가 선하다면, 그래서 세리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면 과연 우리가 세리의 기도를 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그에 앞서 우리가 바리새인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으면서도 세리의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의롭다고 한 세리의 기도를 실천함으로써 또 하나의 자기 의를 쌓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지 않으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예수님이 기도 내용을 따지면서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속성을 기도를 배경으로 하여 드러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기도는 또 하나의 자기 의였습니다. 항상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리새인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에게 세리의 기도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바리새인과 같은 속성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과연 세리의 기도를 본받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 바리새인과 같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자신이 바리새인처럼 기도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노골적으로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릅니다. 나는 주일성수도 잘하고 십일조도 잘합니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바리새인의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역시 세리의 기도를 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비교 의식 ◉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누가 더 신앙인의 모습으로 비춰지느냐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우리에겐 바리새인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악하다고 생각하고 신앙이 바리새인처럼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세리와 같은 사람이 참된 신앙인일까요? 과연 여러분은 바리새인 같은 사람, 세리 같은 사람이 있을 때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리새인은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한 것처럼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사람들과 같지 않고 세리와도 같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이 없을 정도로 반듯한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항상 율법을 실천하기를 힘썼던 바리새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또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기에 신앙적으로도 모범이 되는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도덕적으로 반듯하고 인격도 좋으며 신앙생활에도 부지런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에게 세리는 로마를 위해 일하는 매국노였으며 세금을 과다하게 부과하고 강제로 거둬들이면서 토색하고 자기 배를 불리는 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둘 중 누구를 참된 신앙인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여러분의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누구처럼 살라고 할 것 같습니까? 바리새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삶에서의 믿음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이미 우리에게는 바리새인처럼 사람의 행위를 보고 선과 악으로 구분하며 악한 행위보다 선한 행위를 더 의롭게 여기는 의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우리가 세리의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세상 사람이 세리처럼 행동한다면 세상의 질서가 엉망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처럼 행동한다면 도덕적으로는 반듯해질 것입니다. 비록 서로 자기 의를 자랑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세상의 질서만큼은 어지럽게 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교회도 세리보다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은 바리새인 쪽으로 향하고 있으면서도 바리새인을 비판하게 되는 것은 바리새인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는 기도를 했다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교만으로 생각하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보다도 못하고 나보다 모른 사람에 대해 무시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고 전혀 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차라리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솔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교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를 자랑하는 것이 노출되면 자신의 신앙 평가에 손해가 되고 타인에게 좋지 않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표기도를 할 때 누가 바리새인처럼 기도하겠습니까? 다들 세리처럼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가 자신의 겸손과 믿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누구에게로 향해있을까요? 또한 우리의 속마음에는 바리새인과 세리 중 누구의 속성이 자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한 우리는 바리새인의 속성을 가지고 살면서 늘 타인과 나를 비교하게 됩니다. 이것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 누가 바리새인인가 ◉

 

9절을 보면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 자리에 특별히 자기를 의롭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일까요?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심으로 믿음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면 스스로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기고 그런 자신과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은 멸시하는 바리새인의 속성으로 사는 것이 이 세상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14절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세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 말씀이 진심으로 이해가 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삶의 모습에 대해서도 비교하며 선과 악으로 판단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중요한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삶의 모습이 우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그러면 엉망으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까?’라는 반발이 있다면 그것은 외적인 삶의 모습에 차별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리처럼 사는 것보다는 바리새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신앙이 더 낫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목사는 설교를 잘하고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라도 예배당을 크게 짓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교인에게 전도를 강조하는 것도 다른 교회보다 더 나아지고 싶어 하는 마음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순순하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명감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교회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결국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모습들을 본다면 이미 우리는 바리새인의 속성에 깊이 빠져든 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세리처럼 기도하고자 하는 것 또한 자기 의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로 여기지는 것을 실천하는 자기 성취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말씀 또한 자신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높아지기 위해서 즉 겸손하다는 평가와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자가 오셨을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처럼 참된 믿음을 보기가 힘든 것이 세상의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풍성한 것처럼 보인 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처럼 하면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오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와 같은 사람을 보면 믿음이 없다며 비판을 앞세우기도 합니다.

 

◉ 은총의 세계 ◉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의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자기 의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세리처럼 착한 일을 하지 말고 악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처럼 반듯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의가 될 수 없음을 깊이 자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남보다 더 반듯하게 살았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나은 자로 여겼던 그것이야 말로 자신을 높이는 바리새인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의를 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였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세리처럼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는 의는 우리의 실천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서 의가 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또한 죽은 자를 두고 누가 더 낫다고 비교하는 것만큼 헛된 일도 없습니다. 다만 죽은 나를 살리는 능력이 주께 있음을 믿으며 주만 바라볼 뿐입니다. 이것이 은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로 묶여 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죽은 자를 불러서 하나로 묶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결된 관계에 있게 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은 우리를 살리신 것은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든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 되지 못하고, 반대로 악한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죽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바리새인의 모습이 잔뜩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은총의 세계에서 경험되는 것은 오직 기쁨과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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