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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6 09:42

(97강) 평화에 관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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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9:41-48http://onlycross.net/videos/nuk/nuk-19414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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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설교>

 

◉ 앎과 삶 ◉

 

학교 수업에는 진도가 있습니다. 배워서 알게 된 것만큼 그 지식과 실력은 나아지게 되어 있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로,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로 진급을 하는 것이고 좀 더 전문적인 학문을 위해서 대학교에 진학을 합니다.

 

 

하지만 신앙에는 진도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진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설교를 들어왔다고 해도 생각해 보면 어제나 오늘이나 신앙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십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학문은 배워서 머리에 담고 있는 것을 꺼내 놓으면 되지만 신앙은 머리에 담은 것을 꺼내 놓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이런 우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십자가의 삶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을 버릴 수 없고, 버리려고 해도 버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앎이 육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실상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절)고 고백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역시 예수를 안다고 해도 삶은 늘 제자리이고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을 십자가에 앞에 세우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말씀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말씀이 나를 어떤 존재로 드러내며 증거하고 있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로 간주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만이 말씀이 이끄는 은혜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다스림의 의미를 오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말씀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으로 사는 것을 자기 욕망이 다스려지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죄를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는다’는 말씀처럼 죄는 늘 욕망으로부터 분출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를 다스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가 다스려질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도, 본문에서처럼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는 인간의 이러한 실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 우시는 예수님 ◉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신 예수님이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제자의 온 무리가 그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말할 정도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성을 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볼 때는 울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성은 견고하게 세워져있고 많은 사람들이 성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도무지 울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예수님 홀로 성으로 인해 울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이 우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을 보시고 우시는 것은 성에 들어가셔서 겪으실 고난 때문이 아니라 성이 안고 있는 심판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루살렘 성은 평화롭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하는 성전이 존재하는 그들의 신앙의 중심지로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함께 하신다는 상징으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신앙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그들이 붙들고 있는 어느 것 하나도 그들을 심판에서 건져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는 시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42-44절)고 하십니다.

 

 

흔히 이 구절을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되는 것과 연결하여 이해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사십 여년 후에 예루살렘이 겪을 재난을 미리 바라보시면서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예루살렘이 불쌍해서 흘린 눈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 때문에 흘린 눈물이라면 눈물을 흘리고 우실 것만이 아니라 백성들을 권고해서 힘을 모아 로마와 싸울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 성이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등진 상태이며, 이 상태는 예수님이 성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선포하신다고 해도 변화될 수 없을 만큼 너무 강퍅해져 있기에 성의 함락은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며 따라서 어찌할 수 없는 성의 형편을 바라보시며 우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우시는 본질적인 이유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의 함락과 아무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성의 백성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심각성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시는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예루살렘 성의 백성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십 여년 후에 있을 성의 운명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자신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게 되는가이며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영원한 심판에 있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했습니다. 성전이 있고 여전히 하나님께 제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하나님의 원수였으며 심판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성전만 붙들고 있는 그들을 향한 눈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평화를 알지 못함 ◉

 

예수님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고 하시면서 이어서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사면으로 가두고 자식들을 땅에 메치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평화의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성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일까요?

 

 

그러면 평화에 관한 일을 일러주시면 되는데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 쫓으시는 일은 또 왜 행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그 내막을 알지 못하면 사실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보면 말 그대로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수’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주지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 역시 세상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 애당초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생각한다면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라는 말의 의미는 ‘평화가 예수님으로 인해 이루어짐을 알았더라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평화의 길로 오신 분임을 알았다면 너희가 참된 평화의 세계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아니라 원수 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그 주된 이유가 성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라는 말씀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울음은 예루살렘처럼 자기 종교에 갇혀서 참된 평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향한 울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들을 교회 중심으로 살게 하려고 힘을 씁니다. 그래서 교회 중심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신앙생활인 것으로 강조합니다. 교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열심히 활동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바르게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착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하는데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하고 다만 원수 관계로 존재할 뿐입니다.

 

 

이 관계는 무엇으로도 해소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바치는 제물과 정성, 그 어떤 것으로도 해소될 수 없습니다. 이 관계를 화목의 관계로 전환시키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 성전입니다. 성전의 제사와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 될 수 있는 길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화목 제물에 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전에서의 제사를 자기 의로 삼았습니다. 죄 없는 제물의 희생이 자신들을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목하고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의가 되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복을 누리며 잘 살게 되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착각인 것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하고 십자가를 말하며 예수님이 화목 제물 되신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표면적인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평화에 관한 일을 안다면 모든 의를 주께만 두어야 합니다.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무엇을 바치고 어떤 활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생활이 신앙이 될 수 없다는 말에 대해서도 그같이 반응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 하나님과의 평화 ◉

 

예수님은 화평에 관한 일을 알게 하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심과 동시에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가 곧 화평의 본질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굳게 자리하고 있는 성전은 무너져야 하고 대신 예수님의 피가 세워지는 것만이 하나님과의 화평에 있게 되는 길임을 나타내시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신앙은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님만이 나의 의로움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모두 아는 내용이라고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자기 의를 추구하며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부각되고 싶어 하며 그것을 위해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의가 되신다는 믿음의 내용에 충실하며 말씀과 하나 된 길로 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제물의 죽음과 피 흘림이 있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소통을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물의 죽음과 피 흘림으로 인해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성전이 제물을 바치면 다 되는 것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오늘날 교회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화평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의 결국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무너짐으로 끝날 뿐입니다. 성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수많은 제물이 바쳐진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예수님이 오늘 교회를 향해서 우시고 우리 자신을 보시고도 우신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하지 않아서 우실까요? 교회 생활에 열심이 없어서 우실까요? 우리가 화평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할 때 그것이 예수님의 울음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성이 몇 개의 돌로 세워졌을까요? 몇 개의 돌로 세워졌든 그것이 성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지 못합니다. 이 돌을 오늘날 교회의 교인 수로 빗대어 생각해 본다면 무슨 의미가 될까요? 교회가 몇 명의 교인으로 구성되어 있든 교인 수로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져 있고, 머릿돌 되신 예수님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만 여겨질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인 수도 사실상 무의미한 것입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눈에 숨겨져 있던 평화의 일이 십자가로 인해 드러났습니다. 평화의 일은 더 이상 숨겨진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전히 숨겨져 있는 것처럼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고 유대인처럼 보이는 것을 붙들고 그것으로 자기 신앙을 지탱하고자 한다면 결국 무너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로 모여서 무엇을 하든 확인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눈에 보이고 행하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에 있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봉사도 부지런히 하셔야 합니다. 숨겨져 있는 자기 의를 향한 욕망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확인할수록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오시고, 평화를 이루신 예수님의 의로우심만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내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시고 의로움이라는 것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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