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9.26 17:29

(80강) 전신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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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6:10-12http://onlycross.net/videos/eph/eph-0610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설교>

 

우리의 신앙 현실에서 부딪히고 경험되는 갈등과 문제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신앙인으로서의 덕목과 실천 사항에 해당되는 몇 가지만 잘 지켜 실천하면 믿음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에서는 부딪히고 갈등될 신앙의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참된 신앙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알아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깊어질 때 필히 기존의 앎과의 부딪힘과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것을 받아들였을 때 기존의 모든 신앙생활을 부인함으로 다가오는 허망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 때문에 참된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오랫동안의 신앙생활로 인해 쌓아진 자신의 공적이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성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껏 말씀을 통해 확인한 바는 신앙의 길에 우리의 행위, 우리의 공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의 결과이지 나의 열심이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애당초 무너져야 할 공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자신의 의지와 열심과 연결된 행함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나의 공적이라는 것이 쌓이게 되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는 이것이 바로 싸움입니다. 흔히 신자의 영적 싸움이라고 하면 죄의 유혹을 이기고 시험에 빠지지 않고 교회 생활에도 등한시 하지 않고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힘쓰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과연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마귀의 간계일까요?

 

 

바울은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0,11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 죄의 유혹을 이겨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 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일까요?

 

 

인간은 죄를 이길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었다 해서 죄를 이기는 능력이 주어지고 그 능력으로 모든 죄를 물리치며 유혹에도 빠지지 않고 믿음으로만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도 마귀의 간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진갑주의 용도가 죄를 물리쳐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 게으르다’고 말할 때 무엇을 기준해서 그러한 말을 합니까? 모두가 ‘내가 무엇을 했는가?’에 초점을 두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고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결국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그 일을 하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여러분이 행하는 것들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대단한 착각과 망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는 선한 것 자체가 나올 수 없는데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한다 해도 그것을 자신의 의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신앙의 근거 또한 자신에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게 되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신앙은 모든 근거를 하나님께 두고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경험은 말씀으로 인해 자신이 해체되고 내세울 것이 없는 무능한 존재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모든 근거를 하나님께 두었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를 한 시간씩 하고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고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뛰어난 실천을 보인다 해도 그 모든 실천이 자신의 믿음과 열심에 의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싸움은 ‘신앙의 근거를 어디에 두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간계는 신앙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고 살게 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신앙생활로 착각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속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간계는 속임에 빠져 다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하와를 유혹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이었는데 마귀는 죽지 않는다는 인간에게 유리한 말로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거짓말로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게 하고 결국 자기를 위해 선악과를 먹게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마귀의 간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살게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무엇일까요? 전신갑주는 싸움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싸움, 즉 하나님께 속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합니다.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자신에게 속한 싸움입니다.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싸움은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하나님께 속한 싸움이고 이 싸움을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면 악한 영을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뜻일까요? 사도 바울은 전신갑주를 입으면 승리한다고 하지 않고 다만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기 위한 전신갑주가 아니라 마귀의 간계, 즉 마귀의 속임수를 대적하기 위한 전신갑주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귀의 속임수를 따르지 않고 참된 진리의 말씀의 길로 가기 위한 전신갑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엇인지 그 의미가 조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서만 나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신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의 손으로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전신갑주를 하찮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귀의 간계에 빠진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체험되는 것을 신앙의 증거로 여깁니다. 눈에 보이고 체험된 것이 있어야 그것을 자기 자랑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신갑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체험되는 것도 아닙니다. 전신갑주가 비록 우리로 하여금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게 하고 진리의 길로 가게 하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치 있는 것으로 자랑될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전신갑주를 하찮게 여길 수 있고 관심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신갑주는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의가 되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죄 없는 자로 하나님께 나오게 하는 그리스도의 세계를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진리가 된 의의 세계 안에 있을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신갑주가 어떻게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는 것이 될까요? 마귀의 간계는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을 자신의 의지와 열심으로 죄와 싸워 이기며 더러운 자에서 점차 깨끗한 자로 변해 가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이 마귀의 간계이며, 신앙에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 행함에서 그 열매를 찾게 하는 것도 마귀의 간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신갑주, 즉 그리스도의 의의 세계 안에 있게 되면 그 모든 것이 부인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 부인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인해 의에 참여하게 된 자일뿐이며 자신에게서는 그 어떤 의의 행위도 나와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마귀의 어떤 간계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본다면 보이는 것은 자신에게 매이고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죄의 모습 밖에 없습니다. 만약 복음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며 피의 은혜 아래 있게 된 것이 기쁨으로 그 마음에 자리하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을 성령의 역사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신자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은 신자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 속에서 자신을 놓지 않고 붙드시고 의의 세계로 끌어가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서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로 굳게 서게 됩니다. 신자는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라 사망에 갇힌 나를 피로 값 주고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을 존재 이유로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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