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6.14 08:26

(2강) 복음으로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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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1:2-5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1020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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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2-5)

 

 

<설교>

사도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한 기간은 겨우 3주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3주의 복음 전파로 무슨 큰 효과가 있겠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에 나타난 결과는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3절에서 언급한 대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으며,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찾아온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의 이런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그들을 기억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에 믿음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이 그만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사도가 복음을 잘 가르쳤기 때문일까요?

 

 

이것을 사도는 5절에서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사도의 능력도, 탁월한 말재주도 아니라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그들에게 이르렀기 때문에 나타난 열매라고 말합니다.

 

 

히 4: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며, 신자에게 지식으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다스리고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능력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말로만 이르지 않고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신자를 장악하고 있다면 신자에게서는 그에 합당한 열매가 드러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비록 자신은 떠나 있으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그들에게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지키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신자에게 함께 한다면 어떤 열매가 나타나게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능력이나, 성령의 능력이 주술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체험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에 그러한 체험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3절에서 사도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되어진 데살로니가 교회의 열매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복음을 안다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열매가 자신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준으로 한다면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으며, 소망의 인내가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 7:17-18절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안다면 그는 분명 좋은 나무입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지식이 있고, 복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지 마시고 좋은 나무로써 아름다운 열매가 있는가로 스스로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한 열매를 종교적, 도덕적 행함이나 활동으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러한 것은 복음으로만 맺어지는 열매의 특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나타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오직 복음으로만 맺어질 수 있는 열매였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이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믿음의 역사라는 말을 인간의 계획과 소원을 성취하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인간이 믿은 대로 되어지는 것을 믿음이 역사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신앙입니다. 물론 십자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간의 신앙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는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즉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처럼 믿으며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환난과 핍박이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으로 낙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의 증거물입니다. 신자 역시 자신의 연약함을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러한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지 않고 믿지 않는 결과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참된 세계가 있음을 믿게 하심으로 어려움과 힘든 일에서도 주를 의지하는 믿음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역사가 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이웃을 돕기 위해 수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수고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나타난 사랑의 수고는 인간관계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의 사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단지 이웃을 돕는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웃 사랑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당연한 것이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이웃 사랑은 도덕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자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고난과 핍박의 길을 거부하지 않으신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아는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에서 주어지는 환난과 핍박을 거부하지 않게 됩니다. 환난과 핍박에서도 오직 주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수고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편함과 이익을 구하는 믿음이 아니라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생명이신 주를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인해 나타나는 열매이며, 주를 사랑하기에 나타나는 수고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이익을 위해 주를 찾는 것은 주가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들이 수고롭게 행하는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도 결국 자기 사랑을 위한 수고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도 ‘주를 믿으면 언젠가는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소망의 인내는 소망이 인내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소망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소망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메시아가 오심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멸망의 자리에 있는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메시아를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음에 처한 자임을 아는 신자라면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이고, 그 소망이 세상의 모든 일에서 인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육신의 삶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어떤 분으로 오셨든 상관없고 내 생활에 도움만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는 의도로 예수를 찾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4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신자에게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에게서 나타난 믿음의 흔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앙위에 완벽히 서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여러분께 말로만 이르지 않고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역사하면서 믿음의 길로 인도해 갈 것이고, 그 흔적이 나타나는 증거물로 나타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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