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6.21 20:09

(3강) 믿음의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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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1:6-8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106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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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 1:6-8)

 

 

<설교>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결단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의 결과이고, 믿은 후에 성령이 오셔서 믿음이 강하게 되도록 도우시고 능력을 주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결단이 빠질 수 없는 필수 조건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성령이 오신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이 역사한 결과이고, 믿음의 삶 또한 성령의 능력의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에게서 나타난 어떠한 믿음의 삶도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믿음의 삶이라면, 그 삶은 자기 힘으로 산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을 어떤 사람은 ‘극단적 은혜주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너무 은혜에 치우친 말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몫도 남겨두고 인간의 행함이나 공로도 적당히 섞어서 말을 하는 것이 인간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강조할 수 있는데, 너무 은혜만 강조하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사라지기 때문에 신자를 나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성령의 능력과 인간의 행함을 적절히 혼합한 것입니까? 물론 신자가 믿음에 의해서 행하게 되는 것은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알게 됨으로써 형제를 용서하게 되고, 자기 죄를 깨달음으로써 회개하게 되고, 세상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모든 것이 믿음으로 인한 행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닙니다. 즉 인간의 의지와 결단이 역사함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행함도 자신을 나타낼 도구로 활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대개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처럼 우리도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도록 하자’라는 교훈적 의미로 활용을 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의 본이 되기 위해 실천해야 할 내용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8절의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는 내용도 같은 의미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사방에 믿음의 소문이 퍼질 수 있도록 합시다’라는 교훈적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본이 되고 믿음의 소문이 퍼지는 교회가 되라는 의도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사도에게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교회로 하여금 믿는 자의 본이 되고, 믿음의 소문이 퍼져야 한다는 의도로 하는 말이라면 다른 교회에 보낸 서신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예로 들었어야 합니다. 즉 믿음이 엉망인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본을 보이고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 너희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아서 믿음의 본을 보이고 믿음의 소문이 퍼지는 교회가 되도록 하라’고 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이 믿음의 본이 되고,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본이 되라거나 소문이 퍼지도록 하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본이 되고 각처에 퍼진 믿음의 소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그들의 노력과 힘과 의지에 의한 열매였다면 바울은 말은 그 같은 믿음의 모습을 보인 교회를 칭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5절의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말로만 이르렀다면 나타날 수 없는 모습들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르렀기 때문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나타난 믿음의 모습들은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증거물이기에 각처에 퍼진 믿음의 소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이 좋다는 의미의 소문이 아니라 복음이 능력으로 그들에게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단지 교회가 좋은 소문이 나기만을 기대합니다. 교회가 믿음의 좋은 소문이 난다면 교회에 득이 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믿음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일하심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에 복음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좋은 믿음을 보여주고 좋은 소문을 내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을 행하려고 합니다. 가령 노숙자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불우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 서는 일을 통해서 교회를 소문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6,7절을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많은 환난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사도와 주를 본받는 것이었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환난 가운데서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 역시 환난 가운데서 주님이 가신 길에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오셔서 역사한 결과입니다. 성령이 주를 고난의 길인 십자가로 인도하셨고, 성령을 받은 사도들 역시 예수님과 똑같이 고난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한 데살로니가 교회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으며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능력으로 그들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8절 끝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는 말을 합니다.

 

 

교회가 사도와 주를 본받고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게 된 일에 대해서 사도가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복음이 그들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함께 함으로써 나타난 증거들이기 때문에 사도는 단지 주께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능력으로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한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많은 환난에서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게 되고, 항상 천국을 소망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신자 된 자신의 믿음의 능력이 아니라 복음이 역사하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어떤 삶도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잊지 말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고집으로 자기 백성을 어둠의 세상에서 붙들어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어떤 말씀도 기쁨으로 다가올 수가 없는데 어느 순간 말씀이 기쁨이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면서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주를 의지하게 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신자가 자신에게 나타난 믿음의 모습을 자기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역사하는 증거물로 제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증거물로 존재하는 신자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는 서로에게 본받을 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실천과 업적을 보여서 자신을 본받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 그대로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신자로 존재하고,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예수님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본받을 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함께 하심과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여 응답받고,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 아닌 간증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과 어려움에서 변함없이 주를 믿는 믿음으로 복음이 내게 역사하고, 성령이 함께 하고 있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이런 증거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증거하고자 자기 백성을 환난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환난에서 주를 바라보는 믿음에 세우심으로써 예수님이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이런 증거물로 부름 받았고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니라 복음이 증거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그런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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