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07.12 08:08

(5강) 복음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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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6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2010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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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설교>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외치시는 예수님을 보면 참으로 거침이 없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이라고도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자부하는 그들을 마귀의 자식으로까지 말씀하기도 합니다.

 

 

듣는 자의 입장이나 기분은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든 그것은 듣는 자의 몫이었을 뿐, 예수님은 좋은 반응을 기대하고 말씀을 외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거부당하고 배척을 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시면서도 그들의 반응에 조심스러워 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기에 연연하거나 세상에 머리 둘 곳을 만들기 위해 힘 있는 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전혀 없이 말씀을 외치신 것입니다.

 

 

왜 꼭 그렇게 하셔야 한 것입니까? 굳이 상대방을 자극하고 분노를 일으킬 말보다는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취하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것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우리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진리는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통하여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설득하여 끌어가는 작업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인간의 대화고 설득이 필요한 일이라면 우호적인 인간관계는 중요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며 말을 해야 하고 자극하는 말도 삼가야 합니다. 그래야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대화도 설득도 아니라 일방적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듣고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이 설득을 당하거나, 말하는 자에게 감동되어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 29:2-4절을 보면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이적과 기사를 보았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도 몸소 체험했습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고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사와 이적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광야에서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고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한 것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하나님이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설득으로 하나님을 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이적과 기사보다 더 효과 있는 설득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보고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마음과 눈과 귀를 주심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말씀은 인간의 입장과 기분을 배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입장과 기분을 배려하여 말씀하실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특성이 죄에 있으면서도 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의에 붙들려 있는 인간을 책망하면서 저주와 멸망과 영원한 죽음이 자신의 본질임을 보게 하고 참된 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특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이 안고 있는 특성 또한 그대로입니다. 성경 말씀 자체가 인간의 입장과 기분을 배려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전달해야 하는 것이 신자가 할 일입니다.

 

 

이 말을 설교자는 신자와 대화할 필요가 없다거나,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든 말든 내 말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의식했을 때 진리는 진리 그대로 드러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전하는 자는 참으로 어려운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는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4절)고 말합니다.

 

 

 사도는 복음을 위탁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탁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사람의 입장과 기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인간의 죄와 악함을 드러내는 말은 주저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말은 5,6절의 말씀대로 사람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환심을 사고 사람의 마음을 얻음으로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복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항상 인간의 욕망과 충돌하면서 죄의 권세에 붙들려 있는 인간의 실상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아첨의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말이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이란 어떤 면에서 보면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금 신자의 말에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자신이 싫어하는 말, 기뻐하는 말에 대해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무슨 말이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가를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은 설령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고 해도 직접적인 반응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설교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상실한 채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에 주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곧 복이 된다는 말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게 돌아올 복에 관심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소위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에 대해 바울과 같은 입장을 고수할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설교를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나거나 속임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영광을 위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의도로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간사함과 부정에서 난 것이고 속임수일 뿐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복음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위탁받은 복음만을 가지고 갔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라면 내게 기쁨으로 다가와야 하고 평안과 은혜가 되어야 하는데 왜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화가 나게 하느냐며 복음이 아니라고 밀쳐 냅니다. 참된 복음이 인간에게는 오히려 충돌과 갈등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에 빛이 무엇이고, 죽음의 땅에 임한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선포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신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사람의 반응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이 복음을 위탁받은 것이 사도이기 때문에 사도 또한 사람을 염두에 두거나 의식하지 않고 위탁 받은 복음만을 외치는 것입니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신 아들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과 아들을 보내신 분을 알려면 필히 우리가 죽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가 죽었음을 외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일하심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로 다가왔는가를 말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의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정신이고 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입니다.

 

 

만약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의도로 말한다면 분명 사람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을 할 수밖에 없기에 그것은 복음의 정신이 상실된 다른 복음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십니까? 죽은 자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일하시는 것일까요? 사업을 번성하게 하고 자식을 잘되게 하는 것으로요? 건강하게 하고 여러 가지 사고에서 지켜주시는 것으로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떤 특정한 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상관없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자기 백성을 생명이신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가시는 모든 일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면, 신자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 마음을 그렇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광을 구하거나 사람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은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리가 죽은 자임을 알게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 사는 인간에게 갈등과 충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와 보는 눈을 주신 택한 백성들은 복음에서 자신의 죽음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되고 감사의 마음으로 교회를 찾게 됩니다. 신자는 이런 마음으로 만나고 교제하면서 그리스도의 증거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정신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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